대전교구 신례원본당 여사울공소는 한국 가톨릭교회 첫 수덕자 홍유한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홍병주ㆍ영주 형제 성인을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가 살았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1959년 지은 여사울공소 전경.
대전교구 신례원본당 여사울공소는 충남 예산군 신종여사울길61-2에 자리하고 있다.
‘여사울’ 지명 유래에 관해 일반적으로 ‘~과 같다’, ‘~과 비슷하다’는 ‘여(如)’자가 ‘서울’과 합쳐져 ‘여서울’, 곧 ‘부유한 기와집이 즐비해 마치 서울에 온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삽교천과 무한천을 중심으로 너른 내포 평야가 펼쳐져 있는 충청남도 서북부 지방이 강과 바다의 물길이 교차하는 교통 요지여서, 농업과 상업으로 재산을 일군 이들이 많이 살아 ‘여사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 여우가 자주 출몰해 ‘여사울’로 불렀다는 견해도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 첫 수덕자인 홍유한의 편지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는 여사울을 ‘여호(餘湖)’, ‘여사동(餘事洞)’, ‘여촌(餘村)으로 표기한다. 여호는 ‘여우’를 일컫는 말이다. 여사동, 여촌 또한 여사울의 다른 표기로 ‘여우골’(狐洞-호동)을 뜻한다. ‘여사’는 여우의 고어이며, ‘여사골’은 여우가 출몰하는 골의 합성어다. 이 여사골에서 ‘ㄱ’이 탈락해 ‘여사울’로 굳어졌다. 이에 여사울은 여우들이 모여 사는 곳을 뜻한다.
초창기 한국 교회 중심지인 ‘예수 마을’
정민(한양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송담유록」을 근거로 여사울이 여우골이라는 의미를 넘어 ‘예수골’ 곧 ‘예수쟁이(천주학쟁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송담유록」은 여사울을 ‘여소동(余蘇洞)’과 ‘야소동(邪蘇洞)’으로 표기했다. ‘야소(邪蘇, 耶蘇)’는 예수의 한자식 표기다. 당시 발음으로는 ‘녀슈’, ‘여슈’로 읽었다. 따라서 여사울은 ‘예수 마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이름 ‘예수골’에서 변형된 명칭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충남 예산 여사울은 한국 교회 첫 수덕자 홍유한(1726~1785)이 1757년부터 1775년까지 18년간 살았던 곳이다. 아울러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고향이다. 이존창은 홍유한이 여사울에 살 때 태어나 자랐다. 또 여사울은 성 홍병주(베드로)ㆍ홍영주(바오로), 복자 김광옥(안드레아)ㆍ김희성(프란치스코)ㆍ홍재영(프로타시오)ㆍ홍낙민(루카) 등 1801년 신유박해에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순교자들이 이어진 ‘신앙의 못자리’다.
홍유한과 이존창이 활동하던 18세기 말 여사울은 100여 호의 큰 마을로, 20여 호는 예산 두촌면 호동리, 80여 호는 천안 신종면 호동리 두 고을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 80여 호가 교우들이었고, 나머지 20여 호가 비신자였다. 홍유한은 조선 숙종 때 실각한 남인 계열 실학자로 1757년 서울에서 내려와 두촌면 호동리 곧 여사울 8통 3호에 살았다. 홍유한의 7촌 당질인 홍낙교ㆍ낙민 형제도 비슷한 시기에 여사울에 이주해왔다. 1775년 홍유한이 경상도 순흥의 구고리로 이사하자 홍낙민 또한 이듬해인 1776년에 충주로 거처를 옮겼다. 아울러 홍낙민이 순교하자 그의 아들인 홍재영이 여사울로 이사와 살았다.
신례원본당 여사울공소는 1950년대 한국 교회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보석 같은 교회 건축물이다. 공소 내부.
‘내포의 사도’인 하느님의 종 이존창 고향
이존창은 본래 신창(新昌) 성덕산 집안의 사노비였다. 홍낙민이 그를 노비에서 속량해줬다. 그는 어려서부터 홍낙민 형제와 함께 공부했고 잠시 홍유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그는 17세 때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갔고,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영세 입교했다. 이때가 1784년 말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직후였다. 이존창은 여사울로 내려와 가족과 이웃을 입교시키고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펼쳐 여사울을 중심으로 한 내포 지역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집안이 모두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는 1786년부터 약 1년 동안 시행된 ‘가성직제도’ 아래서 신부로 임명돼 활동했다.
이존창은 1791년 신해박해와 1799년 을묘박해 때 체포됐으나 배교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신앙을 회복했고, 주문모 신부를 도와 전교 활동을 했다. 밀사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돼 공주 감영에 투옥된 후 의금부로 이송돼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해 4월 10일 해읍정법(고향으로 보내 처형해 그곳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 명에 따라 공주로 이송돼 6번의 칼을 받고 참수 순교했다.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를 지켜온 여사울공소에 모셔진 성모상.
수차례 박해 겪은 후 1890년 공소 설립
여사울은 1790년대 교우수가 3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교우촌이었다. 그러다 신유박해부터 병인박해까지 수차례 박해를 겪으면서 1890년에 이르러서야 공소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큰 한옥을 고쳐 공소로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마을회관이었던 건물을 매입해 공소로 이용했다. 1959년 교우들이 성금을 모아 지금의 공소를 새로 지어 봉헌했다.
여사울성지에서 50여m 떨어져 있는 여사울공소는 고딕 양식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모더니즘 건축물로, 시멘트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 구조다. 외벽은 회색 칠로 마감돼 있고, 문틀과 창틀, 지붕틀을 흰색으로 칠해 포인트를 주고 있다. 내벽은 흰색 도장으로 마감했고, 제대와 제단 십자가, 천장과 노출 서까래, 마루가 나무로 돼 있어 고풍스러울 뿐 아니라 통일감을 주고 있다. 아울러 기둥들이 없는 장방형 평면으로 너른 공간감을 준다.
고딕 양식을 기반으로 한 시멘트 벽돌 구조에 내부는 기둥이 없는 장방형 강당식 구조는 1950년대 한국 천주교회 건축 양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입구 상부에 성가대석을 설치한 것 역시 당시 한국 교회 건축 양식 중 하나다. 이처럼 여사울공소는 1950~1960년대 한국 교회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보석 같은 교회 건축물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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