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중국 쑤저우교구 쿤산 소횡당성당에서 특별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다. 상하이에서 차로 한 시간여 거리에 있는 소횡당성당은 주문모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성당이다. 물론 지금은 이름만 전해질 뿐 자리도 건물도 다르지만 소횡당성당 마당에는 신부님을 기억하는 흉상이 있고 시내 한 골목 입구에는 ‘주씨’가 모여 살던 곳을 알려주는 표지석도 서 있다.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성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 놀라웠던 것은 기대 이상으로 큰 성당 규모와 제대 뒷벽의 대형 성인화였다. 중국 성인 120위 중 위화단 사건 때 순교한 중국인과 외국인 선교사 32위 사이에 갓을 쓰고 붉은 영대를 한 김대건 신부님도 그려져 있다.
본당 신부님은 전시를 준비하는 우리를 위해 성당 내 피정집을 숙소로 내주셨다. 중국 신자들과 신부님의 다양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는데, 하루를 여는 ‘모닝콜’은 할머니들의 기도 소리였다. 염경기도의 진수를 들려주셨는데 음의 높낮이나 속도가 기막히게 맞는 「성무일도」 소리가 매일 아침 미사 두 시간 전이면 어김없이 울려 퍼졌다. 「성무일도」가 끝나도 여러 기도가 이어졌는데 무슨 기도인지 알 수 없으니 다만 그분들이 청하는 기도가 하느님 뜻 안에서 이뤄지기를 청했다.
알록달록한 나일론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새벽부터 성당에 오신 할머니들은 미사 후에도 가지 않으시고 성당 마당에 앉아 우리가 신기한 듯 구경하셨다. 젊은 중국 신부님에게 허리춤에서 꽁꽁 동여맨 지폐 몇 장을 꺼내주실 때는 영락없는 우리네 할머니였다. 아침에 강아지 한 마리와 슬렁슬렁 성당 마당을 산책하는 할아버지 신부님을 만나면 나도 신부님도 각자 나라 말을 못 하지만 서로를 기쁘게 마주 보며 ‘데오 그라시아스!(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곤 했다. 구십이 넘은 계복상 신부님은 성당 사제관에서 본당 신부님과 사셨는데 1925년에 태어나 195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첫 임지가 소횡당본당이었다는 신부님은 문화혁명 당시에는 성당을 떠나 배를 만드는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2020년 95세로 선종하셨다)
한두 번은 본당 신부님의 사목 방문에 동행했는데 신자들의 애정 어린 손길이 느껴지는 공소도 둘러보고 집으로 초대되어 특별한 음식을 먹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가장 특별한 경험은 돌아가신 조상을 기억하는 연미사를 봉헌하고 나서 하는 예식이었다. 성당 안 뒤쪽 공간에 작은 여(輿)를 놓고 가족들이 모이면 사제는 장엄 예식 때 주교가 입는 카파(큰 망토)를 입고 죽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분향하고 성수를 뿌렸다.
그런데 이 과정을 모두 라틴어로 했다. 참 신기하다 싶어 신부님께 이유를 물었더니 신자들은 자신의 조상은 라틴어로 미사를 했으니 라틴어로 기도해야 조상들이 알아듣고 더 좋아할 것이라며 모든 예식을 라틴어로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하는 판단을 하다가 신자들과 일치하기 위해 오히려 라틴어 경문을 더 공부하신다는 신부님의 사랑이 신자들의 신앙을 더 단단하게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문득 소횡당본당 신자들이 그리운 날은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네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시편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대며 누군가를 판단하는 삶을 회개하고 자꾸만 무뎌지는 마음을 다시 벼린다.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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