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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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교동도에 부는 평화의 바람, 언제쯤 북녘땅에 전해질까

참 빛 사랑 2023. 12. 28. 14:47
 
 
교동도 북쪽 해안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도 모습. 길게 늘어선 흰 건물들이 눈에 띈다. 철책에 가로막힌 우리 인간과 달리 자유롭게 남북을 오가는 새들이 부럽다.



‘격강천리(隔江千里)’. 강을 사이에 둔 것 같이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왕래가 드물어 천 리나 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북한과 가장 가까운 섬’ 인천 강화군 교동도 주민들에겐 매우 익숙한 표현이다. 교동도의 1세대 실향민 고 이범옥(체칠리아) 할머니가 지은 시 제목에도 ‘격강천리’가 등장한다. 고향인 황해도 연백군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시다.



바라보고도 못 가는 고향일세

한강이 임진강과 예성강은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데

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도 못하구나

(이범옥 ‘격강천리라더니’ 중에서)



분단 당시 38선 이남이던 연백군은 6·25 전쟁 전까지 교동도와 같은 생활권이었다. 그래서 전쟁 중 폭격이 심해지자 연백군 주민들은 잠시 머물 요량으로 교동도로 피란했다. 그 수가 섬 원주민보다 두 배나 많은 2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정전협정 후 서부 휴전선이 38선보다 북쪽에 설정되면서 피란민들은 졸지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적잖은 사람이 교동도를 새 터전으로 삼았다. 그중 대다수는 한반도에서 비옥하기로 손꼽히는 연백평야에서 소출을 거두던 숙련된 농부였다. 실향민들은 이후 남한 땅 교동도에서 피땀 흘려 억척스럽게 황무지를 개간해 옥토로 바꿔나갔다.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은 채로 말이다.
 
교동도 ‘화해평화센터’에서 소임을 하고 있는 순교자의 모후 전교 수녀회 수도자들이 망향대에서 망원경으로 북한 땅을 보고 있다.

평화의 사도들, 평화의 섬에 가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실향민들의 애환이 곳곳에 깃든 교동도를 찾았다. 이 땅에 북방선교 사명을 지닌 순교자의 모후 전교 수녀회가 ‘화해평화센터’를 세운 것은 주님의 뜻이리라.

교동도를 평화 교두보로 만드는 게 목표인 화해평화센터는 2019년 10평짜리 상가에서 시작했다. 이후 인천교구로부터 부지를 지원받아 올해 6월 건물을 새로 지어 옮겼다. 센터는 교동도를 찾는 이들에게 섬 역사를 해설해주고, 때마다 화해 평화 교육을 해주고 있다. 민족 일치와 화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길 위에 평화’ 도보 순례도 진행한다. 또 ‘평화 선교사’로서 지역민을 위해 성경 통독 교실을 여는 등 신앙 길잡이 역할도 맡는다. 모두 평화를 기원하며 행하는 교회의 노력이다. 이번에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센터장 강민아(마리요한) 수녀와 고성순(마리미쉘) 수녀가 성탄 카드를 쓴 것도 북녘에 사는 이들을 향해 썼지만, 수신자 없는 기도 내용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어쩌면 하느님이 먼저 보실지 모른다. 통일이 되어 왕래할 수 있기 전까진 북녘의 주민들이 직접 받을 순 없기 때문이다.

교동도 평화운동가인 ‘사단법인 우리누리평화운동’ 김영애(데레사, 67) 대표는 “수녀님들이 교동도에 평화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계시다”고 말했다. 실향민 2세대인 그는 같은 신앙과 꿈을 공유하는 화해평화센터 수도자들이 섬에 적응하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고 했다.

“우리 ‘평화의 섬’에 ‘평화의 사도’들이 오셔서 기쁘고 감사하죠. 두 수녀님이 평화와 화해 운동을 통해 교동을 앞으로 더 축복 가득한 섬으로 만들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은 화해평화센터 내부 모습.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최전방 트리’ 가 설치돼 있다.


황해도 연백군 출신 실향민들이 터 잡은 섬

김 대표의 배웅을 뒤로하고 두 수녀와 함께 실향민들의 삶이 깃든 교동도 순례에 나섰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교동도의 중심지인 대룡시장. 연백군 출신 실향민들이 고향에 있던 시장을 본떠 만든 장소다. 1960~197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타임머신’ 같은 곳이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황해도식 국밥과 냉면을 파는 식당은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화해평화센터 수녀들은 대룡시장에서 그야말로 ‘인기 스타’였다. 지나가는 가게마다 상인들이 “수녀님, 오랜만이시네요. 이것 좀 드셔보세요!”라며 옷깃을 붙잡기 일쑤였다. 곳곳에 친절함 가득한 상인들을 보며 남북이 하나 된 시장에서 만나면 이런 따뜻한 대화가 오갈 수 있겠다는 상상마저 들었다.

격한 환영 속에 부지런히 걷던 수녀들은 낡은 상점 앞에 멈췄다. 1952년부터 영업 중인 대룡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만물가게다. 피란민들에게 생필품 등을 팔던 요긴한 곳으로, 지금은 갯지렁이·털모자·치약 등을 팔고 있었다.

주인인 안순모(마리아, 92) 할머니는 1세대 실향민. 스무 살 때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피란와 70년간 가게를 운영하며 아들을 의사로 길러냈다. 아궁이가 달린 2평짜리 좁은 가게와 교동도는 이제 할머니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보금자리다. ‘서울로 와서 편히 사시라’는 아들의 권유도 한사코 거절한다고 했다. 조심스레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으시냐”고 묻자 할머니가 잠시 고민하더니 짤막이 대답했다. “가면 좋지.” 찰나의 순간 할머니의 눈빛에서 묵은 그리움이 읽혔다.

 
교동도 중심지 대룡시장에서 70년째 장사를 해온 만물가게 주인 실향민 1세대 안순모 할머니.

시장 명물 ‘70년된 만물가게와 버스킹 공연’

대룡시장의 또 다른 명물은 지역민들이 선보이는 버스킹 공연이다. 밴드명은 KD, ‘교동’의 약자다. 수녀들이 “밴드 리더를 만나봐야 한다”며 이끈 곳은 다름 아닌 교동재가복지센터였다. 대대로 교동도 토박이인 센터장 권순복(요셉, 60)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불쑥 찾은 손님을 반갑게 맞으며 센터 내에 조성한 연습실을 보여줬다. 이곳에서 어르신들 대상으로 음악 교실도 열린다. 지난 2일 화해평화센터에서 열린 송년 음악회에서 권씨는 멋진 무대를 선보였다. 대화가 길어지면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권씨가 바로 교동공소 부회장이었던 것.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제일 젊어 부회장을 맡은 것”이라고 했다.

교동공소의 모태는 황해도 실향민들이 공소예절을 하며 세운 신앙공동체다. 1958년 인천교구 강화본당 소속으로 설정됐다. 현재는 하점본당 소속이다. 공소 건물을 처음 지을 때 권씨의 부모도 많은 정성을 보탰다고 한다. 남북의 상황은 아픔도 낳았지만, 이처럼 신앙의 열매도 맺었다.

“그래서 공소에 정이 많아요. 코로나19 이전에 신자가 많을 때는 성가대를 만들어 어르신들에게 음악을 알려드렸어요. 저희 공소에 계신 방인이(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님 사제수품 60주년에 축하곡을 불러드리기도 했죠. 근데 많은 교우분이 돌아가셔서 이젠 노래 부를 사람이 마땅치 않아요. 얼마 전에 어르신들 모시고 제가 병원에 다녀왔는데 마음이 아팠죠. 지금은 공소가 썰렁한 느낌이에요. 부디 교우분들이 다들 오래도록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성탄 소원이에요.”

 
고성순 수녀(왼쪽)와 화해평화센터장 강민아 수녀가 망향대에 걸린 한반도기 앞에서 손을 맞잡은 채 민족 화해와 일치를 기원하고 있다.

북녘땅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밤머리산 정상

두 수녀가 안내한 순례의 마지막 행선지인 교동도 북서쪽 해안 밤머리산 정상. 이곳에는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려 세운 망향대가 있다. 날이 흐렸는데도 연백평야가 손에 닿을 듯 보였다.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대니 북한 주민들이 다니는 모습과 새로 지은 듯한 주택, 학교로 보이는 건물들이 보였다. 신기함도 잠시, 곧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운데. 철책에 가로막혀 작은 렌즈 너머로만 바라볼 뿐이라니. 망원경으로 유심히 북녘땅을 보는 수녀들의 뒷모습에서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형제이고 피붙인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증오의 시선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너무 큰 비극입니다. 다시 형제자매로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어요.”(강민아 마리요한 수녀)

“우리 민족이 더는 서로 적대하지 말고, 아픔을 보듬어주며 주님의 평화 안에서 화해와 일치를 이루길 바랍니다.”(고성순 마리미쉘 수녀)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