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고속 국도와 전주, 이리가 갈라지는 곳에 초남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의 생가 터가 자리한 곳이다.
1754년 이곳 초남리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대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또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은 이순이(루갈다)와 평생 동정 부부로 살아간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들 동정 부부는 1797년 혼배 후 1801년 치명할때까지 4년간 이곳에서 동정 생활을 했다.
윤지충과 이종 사촌간, 권상연과는 외종 사촌간이 되는 유항검은 전주 초남리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많은 재산과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됐던 만큼 그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대부분 양반의 길이 그러하듯이 유항검 역시 입신 양명을 꿈꾸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일신의 수양을 통해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과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이승훈, 정약전과 인척간이었으므로 이들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목격하고 권철신의 아우 일신에게서 교리를 듣는다. 천주교 교리의 오묘한 진리를 들어 받아들인 그는 마침내 권일신을 대부로 하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고향에서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홍낙민, 최창현, 이존창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된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리하여 윤유일이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초남리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 신부는 그의 집에 머물며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리에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 찍힌 그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 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는다.
그리하여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리고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동생 유관검 등 그의 모든 일가 친척들이 거의 처형되고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는 등 집안은 풍비 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일꾼들과 신자들이 거두어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놓고 김제군 제남리에 가매장했는데 지금은 전주 치명자산에 모셔져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초남리 -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 생가 터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전주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전주 쪽으로 가다 보면 ''동정 부부 생가 터''라는 안내 돌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5km 정도를 더 가면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의 생가 터'' 사적지가 나온다. 지금의 형정 구역으로는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초남 마을이다. 1754년에 류 아우구스티노가 탄생한 곳이자 동정 부부로 유명한 류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가 살다가 체포된 곳이다. 현재 이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는 동산동 본당에서는 1987년에 그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한 뒤 축복식을 했다.
류항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윤지충과는 이종 사촌간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전주 일대에 널리 신앙을 전함으로써 ''호남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초기 신자들이 임의로 마련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에서 신부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교회일을 열심히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다가 1791년의 박해로 이종 사촌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잠시 몸을 피하기도 하였으나, 다음해에는 감영에 자수하여 신앙을 벌겠다고 다짐한 뒤 석방되었다. 물론 이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류항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1795년에 류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류항검의 장남 류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류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게다가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류 요한과 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그 동안 전라도 지역에는 신자들의 이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후 10년 동안 고산, 전주, 무장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복음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한국 천주교회의 반석이 무너지면서 전라도의 신앙 공동체도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먼저 류항검의 아우인 류관검과 윤지충의 아우인 윤지헌이 체포되었고, 이어 류항검도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고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동시에 그들의 가산은 적몰되고 초남리의 집에는 연못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순교로 전주 남문 밖은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에 앞서 류 요한은 부친이 체포된 직후에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동정 부인 이순이와 동생 문철(요한), 사촌 동생 중성(마태오)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과 노비들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중철과 문철 형제는 10월 9일 전주 감영에서 옥사하였고,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에는 이순이 또한 전주 숲정이로 끌려 나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드디어 승리의 날이 왔다. 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동안 류중성(마태오)은 매우 열렬히 늘어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이순이(누갈다)는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간 생각을 하면서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가 다시 천주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면서 그의 용기를 되살려 주었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 이제 문이 열리려 하는 천국으로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들의 옷을 벗기려 하자, 누갈다는 매우 정숙하고 품위있는 몇 마디 말로 그를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 못하게 한 채 맨 먼저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칼날 아래 놓았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4면).
훗날 다블뤼 주교가 순교자 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누갈다의 마지막 증언과 순교 모습은 "모든 조선의 순교자 중에서 우뚝 솟아난 하나의 아름다운 진주"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0호(1999년 11월호), pp.12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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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고속도로와 전주, 익산이 갈라지는 곳에 초남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의 생가 터가 자리한 곳이다.
1754년 이곳 초남리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대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또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은 이순이(루갈다)와 평생 동정부부로 살아간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들 동정부부는 1797년 혼인 후 1801년 치명할 때까지 4년간 이곳에서 동정생활을 했다.
윤지충과 이종 사촌간, 권상연과는 외종 사촌간이 되는 유항검은 전주 초남리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많은 재산과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됐던 만큼 그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대부분 양반의 길이 그러하듯이 유항검 역시 입신양명을 꿈꾸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일신의 수양을 통해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과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이승훈, 정약전과 인척간이었으므로 이들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목격하고 권철신의 아우 일신에게서 교리를 들었다. 천주교 교리의 오묘한 진리를 들어 받아들인 그는 마침내 권일신을 대부로 하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고향에서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홍낙민, 최창현, 이존창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리하여 윤유일이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남리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 신부는 그의 집에 머물며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리에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그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하여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리고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동생 유관검 등 그의 모든 일가친척들이 거의 처형되고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는 등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노복과 친지들이 거두어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 넣고 고향인 초남 땅에 묻지 못하고 들 건너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 바우백이에 가매장했다.
1914년 4월 19일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인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은 바우백이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치명자산으로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 치명자산의 묘소를 개장하여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 터인 ‘파가저택’(破家瀦宅,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사에 가장 큰 형벌로 누구도 다시는 그 터에서 살지 못하도록 흔적을 없애는 것)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과 사돈간인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의 생가 터에서 약 400여m 떨어져 있는 교리당 터도 확인했다. 또한 재남리 뒷산으로 추정해 온 가매장터가 초남이 성지에서 서쪽으로 6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밭터임도 확인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 생가 터를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로 인정하여 1987년 성지로 축복한 후 성역화 작업이 진행하였다. 유항검 생가 터는 또한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여 동안 동정생활을 해온 곳이며,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운영되었던 인근의 교리당 터는 주문모 신부가 호남에서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장소이기도 하다. 2000년 9월 23일 생가 터에 피정의 집과 새 제단 및 각종 성인상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2년 6월 23일에는 종탑과 한옥 형태의 교리당(유항검 사랑채), 당시 사용했던 샘물인 ‘정지샴’을 복원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2005년 5월 28일 사랑채 옆 교리당 부지에 30여 평 규모로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을 일자형 한옥 형태로 건립하여 봉헌했다. 경당 안에는 미사를 봉헌하는 주 신부와 유항검과 신자들의 모습을 인형으로 제작해 놓았다. 2006년 10월 23일에는 파가저택 자리 한편에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3칸짜리 한옥으로 지어진 행랑채는 유항검이 왕손을 며느리로 맞으며 황송한 마음에 따로 별채를 지어 아들 내외가 살 수 있도록 배려했던 곳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14일)]
초남리 -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 생가 터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전주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전주 쪽으로 가다 보면 '동정 부부 생가 터'라는 안내 돌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5km 정도를 더 가면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의 생가 터' 사적지가 나온다. 지금의 형정 구역으로는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초남 마을이다. 1754년에 류 아우구스티노가 탄생한 곳이자 동정 부부로 유명한 류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가 살다가 체포된 곳이다. 현재 이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는 동산동 본당에서는 1987년에 그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한 뒤 축복식을 했다.
류항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윤지충과는 이종 사촌간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전주 일대에 널리 신앙을 전함으로써 '호남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초기 신자들이 임의로 마련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에서 신부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교회일을 열심히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다가 1791년의 박해로 이종 사촌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잠시 몸을 피하기도 하였으나, 다음해에는 감영에 자수하여 신앙을 벌겠다고 다짐한 뒤 석방되었다. 물론 이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류항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1795년에 류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류항검의 장남 류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류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게다가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류 요한과 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그 동안 전라도 지역에는 신자들의 이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후 10년 동안 고산, 전주, 무장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복음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한국 천주교회의 반석이 무너지면서 전라도의 신앙 공동체도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먼저 류항검의 아우인 류관검과 윤지충의 아우인 윤지헌이 체포되었고, 이어 류항검도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고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동시에 그들의 가산은 적몰되고 초남리의 집에는 연못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순교로 전주 남문 밖은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에 앞서 류 요한은 부친이 체포된 직후에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동정 부인 이순이와 동생 문철(요한), 사촌 동생 중성(마태오)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과 노비들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중철과 문철 형제는 10월 9일 전주 감영에서 옥사하였고,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에는 이순이 또한 전주 숲정이로 끌려 나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드디어 승리의 날이 왔다. 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동안 류중성(마태오)은 매우 열렬히 늘어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이순이(누갈다)는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간 생각을 하면서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가 다시 천주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면서 그의 용기를 되살려 주었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 이제 문이 열리려 하는 천국으로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들의 옷을 벗기려 하자, 누갈다는 매우 정숙하고 품위있는 몇 마디 말로 그를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 못하게 한 채 맨 먼저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칼날 아래 놓았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4면).
훗날 다블뤼 주교가 순교자 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누갈다의 마지막 증언과 순교 모습은 "모든 조선의 순교자 중에서 우뚝 솟아난 하나의 아름다운 진주"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11월호] | |
모바일용 요약 설명
초남이 성지는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신희, 동정부부로 유명한 유항검의 맏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과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 마태오 등 유항검 일가가 살았던 생가 터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유항검 일가가 모두 순교하자 유항검의 생가는 ‘파가저택’(破家瀦宅)형을 받아 저수지로 변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 터인 ‘파가저택’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주교구는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 교리당 터, 가매장터를 확인하여 성역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1987년 성지 축복에 이어 2000년 생가 터를 새단장하고, 2002년 한옥 형태의 교리당과 ‘정지샴’(샘물)을 복원했으며, 2005년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을 일자형 한옥 형태로 건립했습니다. 2006년에는 파가저택지에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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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
미사 시간은 순례자와 협의 조정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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