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년)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신례원 본당의 공소를 거쳐 2008년 성지본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로 구성돼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김진후(金震厚), 성 김대건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의 출생지인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농민 출신으로 충남 예산군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의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된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한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커져 갔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 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내포 지역과 여사울 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교구의 뿌리인 여사울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신례원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2008년 1월 성지본당으로 지정되고, 12월 22일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여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사도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새 성당은 2010년 10월 16일 봉헌식을 가졌다. [출처 :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2월 2일)]
여사울 - 신앙의 못자리(이존창의 생가)
천안에서 예산 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신례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서해안의 합덕 쪽으로 향하다가 십 리쯤 되는 곳 오른편에서 여사울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그 곳에는 현재 이존창 생가 터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생가 터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두 개의 첨탑으로 유명한 합덕 성당이 나오며, 성당을 조금 지나 왼편으로 십리쯤 가다 보면 신리 교우촌이 나온다. 이처럼 이 지역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유명한 사적지들을 자주 만날 수 있으니, 바로 이곳이 내포(內浦)라 불리던 충청도 교회의 요람지였다.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여사울'(餘村,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고향이다.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25세 되던 1776년에 양근 지역의 유명한 남인 학자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중인 김범우(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다음과 같이 여사울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존창은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고, 자기 스승(권일신)에게 고향에 돌아가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 전교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잠깐 동안에 자기 가족과 친척과 친구, 그리고 그의 지식과 덕행의 평판에 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다져졌다. 그때부터 내포 지방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312면).
고향으로 돌아간 이존창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셨고, 그 결과는 곧 내포 공동체의 설립으로, 차령산맥 동쪽으로 복음이 확대되어 나갔다. 또 이존창은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에 끼여 1786년 이래 약 2년 동안 지속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사울 이존창의 집은 자연스럽게 교우들의 집회소이자 숙소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존창은 자주 시련과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연이어 고통을 받게 된 그는 배교와 회두를 거듭하였다. 특히 처음 박해 때 형벌과 회유가 번갈아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고, 마침내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비판하고 말았다. 교회 기록에서는 이 사실을 두고 "내포 교우들에게 가장 슬프고도 가장 창피스런 배교였다." 하고 설명하였다.
우리는 이존창의 배교를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에 진정한 회두(回頭)가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신유박해로 서울로 압송되어 판결을 받고 공주로 이송된 그는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 희광이의 칼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낱같은 흉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84년 가을에 신례원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하여 여사울의 생가 터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울 정릉 본당의 협조를 얻어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성의패들이 나옴으로써 생가 터가 분명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때 발굴된 유물들은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