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기획특집

말씀이 세상에 오셨고 그 분은 ‘빛’

참 빛 사랑 2024. 1. 18. 16:54
 
‘말씀’이 빛으로 오신다는 것
어둠에서 ‘새로운’ 것이 보이게 된다는 것…
삶에 희망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그 빛은 하느님의 사랑

그분에게서 나오는 빛과 아름다움,
그분을 바라보는 관조,
이것과 관계되는 시각에 관한 것이 이콘 형성이론의 바탕

 
그리스도, 프레스코, 4세기말, 베드로/마르첼리누스 카다콤바, 로마, 이탈리아. 긴 머리와 짧은 수염 그리고 머리에는 후광을 둘렀다. 그리스 문자로 A, W(Ω)를 썼다.  


1. 인간의 조건

‘주님, 당신의 얼굴을 보이소서.’ 유다인이 절실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구원하는 외침입니다. 구약에서 유다인들이 그리도 원했던 하느님의 형상은 눈에 보이는 형체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로서 우리는 흔히 ‘천사는 날개 달린 존재’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하늘에서 날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날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넣어주신 하느님의 영(靈)만이 아니고, 인간이 볼 수 있는 얼굴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하느님께서 인간의 조건에 맞추어 ‘인간으로’ 나타나신다면 최상이 아닐까?

나라마다 섬기는 신들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보니, 특정 지역에 국한된 종교는 차츰 그 신빙성이 상실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종교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특성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첫째, 누구든지 출신과 관계없이 받아들일 ‘보편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겨울나무처럼 죽었다가 봄이 되면 다시 싹이 트는 ‘부활’하는 개념이 있어야 하고, 셋째 ‘신과 합일’을 이룰 수 있는 종교여야 한다고 합니다.

당시의 그리스-로마 문화와 유다인의 문화를 깨고 ‘인간의 조건’을 조화롭게 엮어내는 외침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부활했으며, ‘구세주’라고 하는 새로운 신앙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분은 유다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설파하였는데(사도 10,34-43), ‘그분을 위해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고 있으며,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외침은 사람들이 원하던 믿음의 특성에 부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둘 순교하고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그분을 받아들일 체계적인 교리를 세울 필요가 점차 대두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호교(護敎) 철학자들이 참여했으며, 그들을 ‘아폴로파’¹)라 하였습니다.(1코린 1,12 참조)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은 국가가 인정하지 않았으나, 철학은 국가에서 묵인하는 편이었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육화한 ‘로고스’라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와 아들: (프레스코, 퀘메테리움 마이우스, 로마, 2세기 초.) 이 초기 이콘은 발전하여 ‘표징의 성모(Orans)’와 ‘하늘보다 더 넓으신 성모’(Platytera)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양측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이 표현되어 있다. 

2. 선하신 스승님

같은 이목구비여도 선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 있습니다. 어떤 권력가가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루카 18,19; 마르 10,17-18) 이렇듯 예수님은 ‘선한 분’이라고 칭송받으셨을 때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라고 겸손해 하셨습니다.

‘선(善)하다’라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타당성이 있을 법한 논리로 하느님에 대해 철학적 개념을 드러낸 학자가 있었습니다. 신플라톤 철학자 플로티누스(205?-270)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빌려 새로운 방법적 ‘존재(存在)’의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존재는 모든 사물, 또는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철학에서는 존재라 합니다.

그는 수많은 존재 중에 최상위의 존재를 초월자(超越者)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초월자에 의해 모든 존재가 창조되었고, 따라서 그분을 존재라 할 수 없기에 ‘일자’(一者)²)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에 의하면 일자(一者)는 모든 완전성의 원천이자 귀환의 종착점이고, ‘선’이라고 불릴 수 있고, 또한 그 선은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창조의 과정을 철학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즉, ‘일자(一者)는 빛이 넘쳐나서 그 빛이 흘러나와(유출) 누스(nous)라는 이성(理性)을 이루고 그로부터 영혼(psyche)이 흘러나오며, 그 영혼으로부터 질료(質料, matter)가 생겨난다. 그렇지만 그는 유출된 존재들은 관조(contemplation)를 통해 자신들을 일자에게로 귀환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하느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교육, 명상과 기도 등의 노력을 통해 하느님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의 사상이 논리적으로 모두 맞다고 할 수는 없어도 2~6세기에 라틴-비잔틴 세계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로써 그분에게서 나오는 빛과 아름다움(美), 그분을 바라보는 의미로써 관조(觀照), 그리고 이것과 관계되는 시각(視覺)에 관한 것이 이콘 형성이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필리스티아 다곤 신을 치심: (프레스코, 3세기, 국립 박물관, 다마스쿠스.) 이 초기 이콘은 1사무 5, 1-4에 나오는 내용으로 필리스티아 인들이 하느님의 궤를 빼앗아 다곤 신전에 두었다가 다곤 신의 몸통이 모두 잘리는 처벌 내용을 표현하였다.


비잔틴 미술은 당시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비례, 균형에서 나오는 수(數)의 개념을 통한 황금 비율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황금 비율에서 나타난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보다, 내면적인 아름다움에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외형적인 미의 척도인 ‘수’의 개념보다는 내면적인 미를 통해 드러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에 더 가치를 둔 까닭이었습니다.

다시 돌아가 선(善)에 대해 언급하자면 일자(一者)와 매우 일치되는 개념을 예수님께서 이미 언급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선을 언급한다면 하느님만이 선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느님만 선한 분이고,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닌가요?

요한 복음은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고 언급하면서 그분은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한 1,1; 4,9 참조) 성경을 읽다 보면 두 가지 면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사실성, 두 번째는 상징성입니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수많은 행적 중에서 어떠한 행적을 골라 기술할 때에는 항상 그 뒤에 숨어있는 상징적인 내용을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예로서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은 병을 낫게 하신 그분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다’라는 것은 치유된 눈에 의해 물체가 보이며, 그 물체를 본다는 것은 ‘빛’을 통해 보는 것입니다. 즉, 복음사가는 ‘그분이야말로 빛’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말씀’이 빛으로 오신다는 것은 어둠에서 ‘새로운’ 것이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 희망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그 빛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선하신 아버지의 모습(요한 14,9-11)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으로 그분도 ‘선하신 분’, ‘임마누엘’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하신 분은 우리에게 오시어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시는 ‘단 하나뿐인 얼굴’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얼굴에서 보았던 선함은 그분 안에 ‘선하신 분이 내재해 계심으로써 얼굴에 나타나는 고유한 빛’이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2코린 4,6) 단 하나의 얼굴로 오신 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
각주

1)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성 유스티노(100?-165), 그리스 출신으로 135년 입교하여 165년 순교했다.

2)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오고 들어가는 단 하나의 절대자.

3)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Immanu) 하느님(El)’.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