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기획특집

주소는 달랐고, 성사는 어수선, 면담자마저 불참… 아주 완벽(?)한 하루

참 빛 사랑 2024. 1. 23. 14:24
 
문화가 다르다는 걸 
받아들여야 함을 알고 있지만
쉽게 극복하기 어려워…
가장 힘들었던 건 약속 시간

  어느 날 문득
 ‘약속이라는 틀에 나를 가두고 있구나’ 생각 

하느님의 사랑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고자 노력하며 
그 사랑 안에서 
더욱 작아지고자 한다면
교우들의 삶의 방식 받아들이고 
그들 삶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만나 뵐 수 있을 것


 
 사그라나 코라존(Sagrado Corazon) 공소에서 세례성사를 베푸는 모습. 
이용규 신부 제공



며칠 전 일입니다. 강론을 쓰던 중 갑자기 책상이 흔들려 ‘또 지진이네’라고 생각했는데, 문자 메시지가 왔다는 휴대폰 진동이었습니다. 본당 사무실에서 온 문자인데, 병자성사 요청이었습니다. 사무실을 통해 성사를 신청한 자매님 전화번호를 받아 연락해보니, 마침 주소가 그날 면담 약속이 있는 공소 근처여서, 바로 나가서 성사를 드리면 면담 시간 전에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곧바로 병자 성유와 영대를 챙겨 출발했는데, 이때부터 생각지 못한 고달픈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갑작스러운 교통체증. 평소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거의 40분 걸려 도착했습니다. 주소를 찾아 길을 가면서도 ‘이쪽에는 사는 사람이 없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무것도 없는 휑한 벌판이 펼쳐져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매님이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저에게 다른 주소를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어찌어찌 도착해 마음을 가다듬고 성호경과 함께 성사를 시작하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살짝 당황해서 가족들을 보니, 다른 가족에게 이 순간을 보여주기 위해 영상 통화를 걸고 있는 사람, 멀뚱멀뚱하게 저를 쳐다보는 사람, 울고 있는 사람까지 다양했고, 결국 저 혼자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성사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어서 약속된 면담이 있는 근처 공소로 향했는데 결국 바람맞았습니다. 간신히 약속 시간에 맞게 도착해서 10분 넘게 기다리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전화를 해보니 일이 늦어져서 올 수 없다는 답변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습니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 중산층 주거지

안녕하세요, 수원교구 소속으로 칠레 산티아고대교구에 파견되어 엘 살바도르(La parroquia El Salvador) 본당에 있는 이용규 프란치스코 신부입니다. 오랜 기간을 칠레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기에(어학연수를 포함 이제 해외 생활 만 4년 됐습니다), 어떻게 이 편지를 써야 할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동안 이곳에 살면서 경험한 일들을 전하고자 합니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저는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이곳은 공항에서 10분 남짓 떨어져 있는 베드타운입니다. 주로 칠레의 중산층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흔히 ‘선교지’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어렵고 가난한 곳은 아닙니다. 물론 공소별로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창문을 깨고 들어와 물건들을 훔쳐가는 도둑들로 골치가 아프긴 하지만, 생각보다 치안도 괜찮은 편입니다.

팬데믹 땐 1주일에 4시간 외부 활동

제가 칠레에 처음 들어올 당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여러 가지 활동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교우들과 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고, 외출하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발급하는 외출 허가증을 가지고 1주일에 2시간씩 2번만 나갈 수 있었기에, 외부 활동에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들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본당의 여러 활동 또한 원래의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칠레 교회와 이곳 교우들을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칠레의 수호성인 ‘가르멜 산의 성모님 축일’에 신자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성모상과 행렬하는 모습.

집 축복하러 갔더니 아무도 없고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약속 시간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기치 못한 사정으로 인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그럴 경우에는 미리 연락해서 상대방의 양해를 구한 후 시간이나 날짜를 변경합니다. 처음 1년 반 정도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교우 분이 집 축복을 요청해 약속을 잡고 방문했는데, 아무도 없어서 전화해보니 일이 안 끝나서 집에 없다고 다음에 다시 와달라고 하는 경우, 약속한 세례 시간에 오지 않아 기다리다가 바로 이어서 있는 다른 공소 미사 시간에 가까스로 도착하는 경우 등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물론, 문화가 다르고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서는 이러한 상황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될 때마다 약속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상황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스스로가 약속이라는 틀에 나를 가두어 자유롭지 못하고, 제가 가진 틀을 갖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강요하고 있구나’란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문화를 더욱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들의 삶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제가 가진 생각의 틀을 앞세운 나머지 이해하기보다는 판단하고, 이들의 문화를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약속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가 했던 많은 약속의 목적은 바로 주님의 축복과 거룩한 성사,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과 시간 엄수라는 틀에 사로잡혀 틀린 것이 아닌,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여 정작 중요한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지 못하고 제 생각이 앞섰던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사제품을 받을 때의 첫 마음을 되새겨보고자, 수품 성구를 다시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주님의 은총을 청해봅니다

어느덧 3년째 이곳에서 사람들과 지내고 있습니다. 칠레의 문화에 많이 적응했고, 이분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길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기에 아직 많은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제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가슴 속에 새기며 살아가고자 노력 중입니다. 아직 부족하기에, 앞에 말씀드린 것과 같은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제 생각이 앞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제 삶의 첫 자리에 모시고자 노력하며 그 사랑 안에서 더욱 작아지고자 한다면, 조금 더 교우 분들께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들 삶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청해봅니다. 함께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후원 계좌 : 신협 131-002-040468
예금주 : (재)천주교수원교구유지재단


 



이용규 프란치스코 신부 / 수원교구 피데이도눔 사제, 칠레 산티아고대교구 엘 살바도르 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