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가 밀 이삭을 뜯어 비벼 먹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바리사이들의 주장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으로 안식일의 참의미를 일깨우신다. 사진은 이스라엘의 밀밭.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예수님과 바리사이 및 율법 학자들과의 단식 논쟁은 안식일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이와 관련, 루카는 안식일에 있었던 두 가지 서로 다른 일화를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화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신 일화입니다.(6,1-11)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던 모양입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들이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하고 항의합니다.(6,1-2)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은 주님께 바쳐진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더럽히는 자는 사형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잘려나갔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사람도 사형에 처해졌습니다.(탈출 30,12-17 참조) 이런 모세 법에 따라 유다 사회에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서른아홉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추수하는 일이 그에 해당했습니다.(탈출 34,21 참조)
문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서 비벼 먹는 것이 안식일 금지 규정에 어긋나느냐 하는 것인데, 밀 이삭을 자르는 것 또한 추수 행위로 여기는 해석이 있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제자들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항의성 질문 또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배고픈 다윗 일행이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 먹어서는 안 되는 빵을 먹은 예를 드십니다.(6,3-4) 구약성경 사무엘기 상권 21장 2-7절에 나오는 사례지요. 다윗이 아히멜렉 사제에게 요청해 얻어먹은 빵은 주님께 바치려고 안식일에 새 빵으로 제단 앞에 차려놓은 것으로 사제들도 함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새 빵으로 교체하고 난 묵은 빵이 사제들 차지였습니다.(레위 24,5-9 참조) 예수님께서 그런 빵을 먹은 다윗 일행의 예를 드신 것은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도 같은 의문을 품었으리라고 추측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예수, 당신이 누구인데 감히 우리가 성왕(聖王)으로 존경하는 다윗과 비교한다는 것이오? 당신이 우리 조상 다윗보다 더 훌륭하고 권위가 있다는 것이오?’
예수님의 답변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6,5)입니다. 문맥으로 보면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과 같은 급으로 놓고 계신다고 할 수 있지요.
루카는 ‘안식일 밀 이삭 논쟁’에 이어 또 다른 안식일 논쟁을 전합니다. 이번에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것과 관련한 논쟁입니다. 밀 이삭 논쟁에서 예수님께 패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이 손을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 세워 놓고는 먼저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6,9)
밀 이삭 논쟁에서 바리사이들의 도전에 반론을 펴신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선수를 치십니다. 쟁점이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앞에서는 안식일에 ‘해도 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의 소극적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안식일에 ‘선을 행해야 하느냐 악을 행해야 하느냐’의 적극적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선을 행할 기회에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던 당시 라삐들의 해석에 따르면, 죽을 위험이 있는 사람한테는 안식일에도 도와줄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죽을 위험에 있는 위태로운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예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착한 일을 할 수 있을 때에 착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악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고 해석하더라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위를 둘러보시고 나서 바로 “손을 뻗어라”라는 말씀으로 그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6,10)
루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6,11)라는 표현으로 기사를 끝냅니다. 골이 잔뜩 났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격앙돼 있다는 것이지요. 왜 격앙됐을까요? 말과 행동에서 의롭다고 자처한 그들이었는데 예수님 앞에서 그 의롭다고 생각한 것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곧잘 내 생각이, 내 판단이 옳고 최고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나 판단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받을 때, 특히 평소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서 그런 지적을 받을 때 어떻게 하는지요? 골이 잔뜩 나서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는가요? 아니면 기분이 좋지 않아도 인정하면서 진솔하고 겸허하게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지요?
생각해봅시다
안식일 논쟁과 관련한 이 두 이야기는 안식일의 참의미, 나아가 율법 규정의 참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새기게 해줍니다. 안식일, 오늘날로 치면 주일은 바로 하느님께 바치는 거룩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지칭하면서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인 하느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심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두 번째 논쟁에서는 안식일을 해석하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여기서는 ‘사람을 위해 착한 일을 하느냐 아니냐’가 기준이 됩니다. 말하자면 ‘사람의 아들’을 위한 날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날’로 확대됐다고나 할까요.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루카복음에서는 빠져 있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는 마르코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마르 2,27)
그렇다면 우리는 시야를 넓히고 생각을 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다면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게 생기고 있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그렇지는 않은지요?
▲ 카파르나움 회당 유적.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 회당이 바로 이 회당 자리였을 것이다.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
알아둡시다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관해 직접 쓰신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사람의 아들과 약간 거리가 있는 듯이 말씀하시고, 때로는 사람의 아들과 자신을 명백히 동일시하십니다. 많은 성경학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묵시문학의 전통과 관련있다고 봅니다. 이 전통에 따르면 사람의 아들은 종말에 죄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러 오시는 존재,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자주 표현하셨다면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 여기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구약 전통에서 나타나는 메시아와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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