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시대에는 세관까지 있던 도시였고 ‘예수님의 도시’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다.
뒤의 새 건물은 시몬 베드로의 집터 위에 세워진 카파르나움 성당.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나병 환자를 고치심(5,12-16)
장소가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5,12)라고 루카는 전합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오복음(8,1-4)과 마르코복음(1,40-45)을 참고할 때 이 일이 일어난 지역은 갈릴래아의 어느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지만 나병(한센병)은 예전에는 천형(天刑)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에 걸린 이들은 부정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함께 살지 못했으며, 그들의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으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야 했습니다.(레위 13,45-46 참조) 나병 환자들은 죄인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소외된 이들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런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5,12) 하고 청합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는 것은 나병에 걸린 사람으로서 부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한 시몬 베드로의 태도를 상기시킵니다.(5,8 참조)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청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시며 주님의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확신한다는 신뢰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십니다.(5,13)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도 얼마든지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을 내밀어 불결과 부정의 표상인 나병 환자에게 대십니다. 손을 댄다는 것, 접촉한다는 것은 받아들임의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나병 환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만이 아니라 불경하다고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통념을, 고정 관념을 불식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곧 나병이 가셨다”(5,13)고 루카는 기록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갔다’를 순화시켜 ‘나병이 가셨다’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떠나갔다’고 나병을 의인화한 표현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붙어 있었을 때 그 나병 환자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늘 억눌리고 짓밟혀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떠나가게 하심으로써 그 사람을 나병의 억눌림으로부터 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예물을 바치라고 분부십니다.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는 깨끗해지면 사제에게 확인을 받고 부정에서 벗어나는 정결예식을 치르는 것이 모세가 정한 율법 규정입니다.(레위 14장 1-31) 예수님의 이 분부는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8) 하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분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져나가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왔다”면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5,15-16)고 기록합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심(5,17-26)
마태오복음(9,1)과 마르코복음(2,1)을 참고할 때 이 일화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등장인물이 조금 다릅니다. 군중이나 환자만이 아니라 갈릴래아와 유다는 물론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율법 학자)까지도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들 앞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병을 고쳐 주기도 하고 계셨습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치유가 “주님의 힘”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5,17)
그때에 남자 몇 사람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누인 채 데리고 옵니다. 군중이 많아서 예수님 가까이에 갈 수 없게 되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께 내려보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환자에게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이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하시며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5,18-23)
이 대목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루카는 그들이 병자의 친인척인지 아니면 이웃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중풍 병자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능히 그러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미음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붕까지 뚫고 병자를 예수님께 내려보낼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뿐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 있음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며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리에 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시빗거리가 됩니다. 죄의 용서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유다인들의 사고에 비춰볼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완고함을 꾸짖는 듯 들립니다.
여기서 생각할 게 있습니다. 루카는 이미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5,17)고 전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의 치유 행위가 주님의 힘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질병이 하느님의 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병의 치유 또한 하느님의 일로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 말씀에는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중적 잣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예수님, 10세기, 채색 삽화, 국립 도서관, 트리에, 이탈리아. |
생각해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습니다.(5,16) 사람들이 나에 관한 좋은 소문을 듣고 나에게 몰려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요?
2)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19)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뿐 아니라 병자의 치유를 바라는 간절함과 진실함이 있었습니다. 선을 지향하는 믿음, 진실함과 간절함이 결부된 믿음은 하늘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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