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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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야기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87) 십자가에 못박히시다(루카 23,26-43).

참 빛 사랑 2018. 11. 21. 20:41


뜻밖에 지게 된 십자가, 우린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못박은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신다.

사진은 골고타에 세워진 예수님 무덤성당 외부 전경. 가톨릭평화신문 DB




이제 예수님께서는 처형장으로 끌려가십니다. 십자가의 길이 시작됩니다. 그 길의 끝은 말 그대로 십자가 처형, 곧 죽음입니다. 편의상 이 대목을 십자가의 길(23,26-32)과 십자가에 못박음(23,33-43) 두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십자가의 길(23,26-32)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23,26) 여기서 “그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루카복음의 맥락에서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이들, 곧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이나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것처럼(마태 27,27-30; 마르 15,16-20 참조), 군사들이 예수님을 끌고 갔으리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왜 루카 복음사가는 군사들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유다인들에게 있음을 암시하려고 했다고 학자들은 해석하기도 합니다.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이란 키레네에 사는 혹은 키레네 출신의 시몬이라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키레네는 북아프리카 해안 지방으로 유다인들이 많이 살던 도시로, 오늘날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끌려가시는 그 길에는 “백성의 큰 무리”가 따랐고 그 가운데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습니다.(23,27) 많은 백성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고 하는 것은 적어도 백성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음을 나타내줍니다. 백성 가운데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도 있었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사형당하시는 것을 몹시 슬퍼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라고 하십니다. 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23,28-2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루카 21,23)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우신 일(루카 19,41-44)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두 가지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내려라’ 할 것이며,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다오’ 할 것이다” 하신 말씀과(23,30),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오죽하겠느냐” 하신 말씀입니다.(23,31)

첫 번째 말씀은 구약성경 호세아 예언서 10장 8절을 인용한 것인데,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의 최후가 어떠할 것인지를 예언한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예수님 시대에 널리 알려졌던 격언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생생한 푸른 나무가 불에 타버린다면 바짝 마른 나무야 얼마나 잘 타겠느냐는 것으로, ‘예루살렘의 딸들’로 표현된 예루살렘이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고통 훨씬 이상으로 예수님을 죽음에 처하게 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 멸망(AD 70년)으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멸망이 무죄한 예수님을 죽게 한 벌로 보면서 이미 현실이 된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미래의 일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 예언 형식으로 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형장에는 다른 두 죄수도 함께 끌려갔습니다.(23,32)



십자가에 못박음(23,33-43)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처형장 이름이 해골인 것은 해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 지형이 해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었다고 합니다. 골고타라고도 하는데 이는 해골이라는 뜻의 아람말 굴갈타를 그리스말로 음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다른 두 죄수도 각각 예수님 좌우에 못박았습니다.(23,33)

루카 복음사가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23,34)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십자가의 못박히신 상황에서 몸소 실천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못박은 이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겉옷을 나눠 가졌다고 전하는데, 이 말씀은 시편 22편 19절을 인용한 것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성경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음을 드러낸다고 하지요.

백성은 말없이 서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도자들은 ‘이자가 정말 메시아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고 빈정거립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하며 조롱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죄수 가운데 하나도 같은 말로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다른 죄수는 예수님을 모독한 죄수를 꾸짖고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23,35-43)


생각해 봅시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어쩌면 과월절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우연히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며 형장으로 가시는 예수님과 마주쳤을지 모릅니다. 군사들은 저러다가는 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인이 해골 산에 가기도 전에 쓰러질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시몬을 보고는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을 것입니다.

시몬으로서는 정말 뜻밖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셈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시몬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학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뒤를 따르는 시몬이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제자들을 표상한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내 짐, 내 십자가가 아니라고 생각한 뜻밖의 십자가를 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시몬이 군사들에게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십자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거나 십자가를 내려놓을 때까지 줄곧 투덜거리는지요. 아니면 뜻밖에 지게 된 이 십자가가 나와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새기며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