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시절, 방학 때면 미국 뉴저지 캠프장에서 일을 도와주곤 했다. 한번은 한국에서 십 대 학생들이 몰려왔다. 캠프 중 수영 테스트가 있었다. 한국 아이들은 수영선수 못지 않은 멋진 자세로 수영을 잘했다. 수영 지도강사는 매우 흡족해하며 우리 아이들의 실력을 칭찬했다. 그러고 나서 수영장 가장 깊은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 차례대로 뛰어내리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아이들이 뛰어들어가는 족족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아닌가? 이에 놀란 지도강사는 허둥지둥 물에 뛰어들어가 아이들을 구했다. 영문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도대체 무슨 일이냐 물었다. 아이들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서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수영 기술이 빼어난 아이들이 ‘깊은 곳’에서 수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원인을 알게 된 강사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우리 아이들을 정렬시켜 앉힌 후, 얕은 곳에서 수영하고 있는 6~7세 미국 어린이들을 불렀다. 그리곤 가장 깊은 곳에 장대를 꽂은 후 그 어린아이들에게 차례대로 뛰어내리라고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어린아이들이 잠시 긴장한 듯했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물에 뛰어내렸고 다시 장대를 짚고 올라왔다. 순간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우리 교육의 민낯을 본 것 같아 속상하고 부끄러웠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지력(知力)’은 인지적으로 학습한 지식이라면 ‘지혜’는 경험으로 깨달은 지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캠프장에서 어린아이들은 수영하는 법은 몰랐지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을 뚫고 나오는 지혜가 있었다. 그것이 너무 부러웠다. 6~7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 깊은 곳을 용감하게 들어갈 수 있었을까? 또 그것을 해내도록 과감하게 가르치는 강사도 위대해 보였다. 수영한다는 것은 단순히 손발을 움직여 물속에서 몸을 뜨게 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깃든 물의 깊이를 체험하면서, 삶의 지혜를 찾는 위대한 인간의 몸짓이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수영하는 법에 대한 지력만 있었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가 부족했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고 재창조하는 ‘깊은 곳’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영기술은 누군가의 경험으로 배운다. 그러나 깊은 곳에 대한 체험은 나 스스로 들어가 습득한다. 그러니까 지력은 남의 경험이지만 지혜는 나의 경험이다. 경험은 살아오면서 저장된 지식을 지혜로 변화시켜주는 훌륭한 교사다. 그 지혜는 낯섦이 주는 불편함과 예측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과감하게 끌어안는 힘이다.
근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철학보다는 ‘철학함’을 배우라”고 했다. 인간과 삶에 대한 학습이 아닌 삶을 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수영기술을 습득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깊은 곳에 들어가 두려움을 뚫고 나오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아는 것을 살아낼 수만 있었다면 벌써 나는 성인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부정적인 잡음이 들린다거나, 뒤에서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라든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순간까지. 나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상황에서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감정이 이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내 모든 경험의 산물이다. 아는 것에 비해 지혜가 부족한 탓이다.
깊은 곳으로 가야겠다. 안전한 얕은 곳에서만 수영한다면 세상이 바뀌고 변화해도 나는 늘 제자리에서 굳어버린 신경망처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에 갇히게 될 것이다. 판에 박힌 삶의 틀에서 안주하면서 말이다.
성찰하기
1. 두려움을 끌어안아요. 새 경험, 새 마음의 틀을 만들어가요.
2. 새로운 경험은 진화된 인격으로 변화시켜주니까요.
3. 익숙한 경험에 의존하면 ‘무의식’에 빠지고 현재를 산다고 할 수 없어요.
4. 아는 것을 사는 것으로, 남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변화시키는 지혜를 찾아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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