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1) 동굴 앞의 엘리아: 템페라, 95 x 71cm, 17세기 초, 비잔틴박물관, 아테네, 그리스. 엘리아는 우상 숭배하는 아합 왕에게 하느님께서 명하신 가뭄 예고를 한 후,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냇가 근처의 은둔처에 숨어있는 모습이다. 그는 까마귀가 물어다 준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1열왕 17,2-6)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열왕 19,11-12) (작품1, 2)
(작품2) 엘리아의 불 병거 승천: 템페라, 58 x 47cm, 17세기, 카렐리야, 러시아. 엘리아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한 후, 그곳을 떠나 호렙 산으로 피신한다. 가는 도중에 천사가 마련해준 음식과 물병으로 힘을 얻어 호렙 산에 도착한다. 그는 많은 행적을 이룬 후 요르단 강을 건너, 회오리 바람에 실려 불 병거를 타고 승천한다. 그의 제자 엘리사는 엘리아의 겉옷을 들고 있다.(2열왕 2,11-13)
하느님께서는 거센 바람, 지진, 불길 속에 계시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권능을 가지신 분, 바람으로, 지진으로, 모든 것을 불로 태울 엄하신 분으로만 여겨져 왔는데, ‘하느님께서는 거센 바람, 지진, 불길 속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번에는 반대로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었습니다.
외국인 눈에 비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말기에 한 외국인은 우리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아침 햇살이 산봉우리에서 아래로 찬란하게 비치는 오월 중순 이후쯤이라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반할 만합니다. 집 바깥을 나가보면 군데군데 늦은 아침을 준비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송아지 울음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있습니다. 한낮에는 꿀벌들의 윙윙거리는 날갯짓 소리, 수많은 꽃 사이를 넘나드는 각종 나비의 춤 추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가 본 조선은 무척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사진1, 2)
(사진1)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한국 여행 회상기, 1923년 재출간. 한국인은 꿈꾸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연을 꿈꾸듯 응시하며 몇 시간이고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다. 한국인은 이 모든 것 앞에서 다만 고요할 뿐이다. 그들은 꽃을 꺾지 않는다. 차라리 내일 다시 자연에 들어 그 모든 것을 보고 또 볼지언정…. 그들이 마음 깊이 담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자연에서 추출한 순수하고 청명한 색깔이다.
(사진2)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1870~1956, 독일 바이에른 출생, 1902년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수도원장, 1911년 1차, 1925년 2차 한국 방문, 1927년 원산, 덕원수도원 설립.
고요함은 각기 다른 요소들의 적절한 어울림
그런데 고요함이란 무엇일까요? 소리가 없다는 것일까? 새들과 곤충들의 서로 부르는 소리 없는 오솔길을 산책한다면 우리는 과연 고요함을 느낄까요?
독일 유학 시절에 주일 미사에 참여하려고 나름대로 깨끗하게 차려입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많지 않았고,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천정이 매우 높고 약간은 어두운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시작과 함께 갑자기 천사들의 합창이 뒤쪽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각 성당을 순회하며 성가를 부르는 성가대의 연주를 운 좋게도 듣게 된 것입니다. 사제의 입장에 맞추어 오르간 반주도 없이, 사부합창으로 부르는 슈베르트의 미사곡은 정말로 감명 깊었습니다. “기쁨이 넘쳐 뛸 땐 뉘와 함께 나누리, 슬픔이 가득할 때 뉘게 하소연하리….” 여러 사람이 합창하는 데도 그 화음의 고요함이란! 음악회에서 수십 개의 악기가 어우러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때, 분명히 큰 소리는 있지만 우리는 거기서 고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요함이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소리가 있어도 각기 다른 요소들의 적절한 어울림이고 또한 화합이란 것을 느껴왔습니다. 어우러져 흐르는 화합은 모두에게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행복을 줍니다.
최고의 고요함은 내적으로 흐르는 사랑
하느님은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고, 잘못한 부류들을 지진과 불로 심판하시는 무한한 힘을 가지신 분, 우렛소리와 번개로 두려움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하시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라고 하셨습니다. 최고의 고요함이며 아울러 어울림까지 이루는 것은 내적으로 흐르는 ‘사랑’이 아닐까요?
고요함이 깨진다는 것 ‘사랑의 빈곤’
고요함이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 여름날에 천둥 번개 치는 것은 고요함을 깨는 것일까요? 태풍이 불어 닥치는 것이 자연 질서를 깨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자연조건에서 나는 소리가 고요함을 깬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고요함이 깨진다는 것은 ‘사랑의 빈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이 부족한 곳은 당연히 시끄러울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악은 고요함을 깨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보아 왔습니다.
이콘은 ‘고요함’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성화는 고통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콘에서 순교를 하면서도 고요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단 하나의 얼굴’을 닮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와 침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근본 원인이시고, 모든 것은 그분의 섭리에 따릅니다. 그분의 섭리를 아무도 알 수는 없지만, 그 안에는 선의 근원이기에 사랑이 깔려 있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고요함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콘에서는 강조합니다.( 작품3)
(작품3) 잠 못 이루시는 하느님: 33 x 26cm, 템페라, 이콘 마오로 미술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때문에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신다.’(시편 121,4)는 내용이다. 이는 우리를 항상 사랑으로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임마누엘로 표현한 하느님 뒤에는 생명의 나무가 서 있다. 옆에 성모님께서 청원의 기도를 드리고 있고, 미카엘 천사는 수난의 도구를 들고 있다. 창문의 밝은 붉은색은 사랑을 의미한다.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만드신 자연의 소리는 고요하기만 합니다.
새소리, 물소리, 벌레 소리, 파도 소리, 빗소리.
당신께서 만드신 빛의 색깔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꽃들과 하늘, 계절의 빛, 익어가는 과일과 들판의 곡식들.
당신의 섭리에 따르는 순리는 고요하기만 합니다.
태어남과 죽음에서, 선을 향한 행동에서, 우리의 변화에서,
당신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이웃에 전하는, 서로에 전하는, 아래로 위로 흐르는 사랑은.
이로써 당신께서 이루신 만물의 화합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당신의 말씀도 고요하고, 그 말씀을 듣는 당신의 모상도
고요하기만 합니다.
김형부 마오로/전 인천가톨릭대 이콘담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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