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 년만에 삼척에 갔다. 오랜 시간 삼척에서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 반대 투쟁을 하는 활동가들의 주름은 그새 조금 더 깊어졌고, 깃발과 피켓과 기도문도 딱 반년 치 더 낡았다. 특히 맹방해변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드문드문 오다 보니 올 때마다 같은 풍경을 본 적이 없다.
이번에는 석탄하역 부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친수구역이라는 이름의 구조물이 바다에 설치되고 있었다. 보트도 타고, 해상활동을 할 수 있는 시설이란다. 여기에 관광객을 위한 4층 리조트 시설도 들어온다고 해변 뒤쪽 소나무 숲이 몽땅 잘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소나무 숲 뒤에는 밭과 공터(주차장)가 있는데, 소나무를 베어버린다고 하니 활동가들이 한탄했다. 거대한 시멘트 공장과 석탄화력발전소의 연기를 관광·레저사업으로 덮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가보다. 참으로 기묘한 공생이다.
거대한 사업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가. 삼척 시민 모두가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적극 유치하려고 하진 않았지만 이왕 들어설 거, 지역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었으면 좋겠고, 이 좋은 풍경을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 나름 괜찮은 것 아닌가 싶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지역 토건사업은 이렇게 진행된다. 지역 발전을 위해, 모두가 살기 위해, 그리고 이왕이면 친환경적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업계획서엔 지역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해당 지역 주민이 아닌 경우엔 더욱더 멀게 느껴진다. 당장 오늘 할 일도 산더미인데, 무얼 더 신경 쓸 수 있겠는가. 신경을 쓴 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는 석탄 배달을 하는 빌 펄롱이 존경받는 수녀원의 문제를 발견하고 이것을 은폐하는 지역 공동체를 마주하는 내용이 나온다. 수녀원 이야기를 하는 빌에게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생각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생각할수록 울적해지기만 한다고.”(빌이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책이나 영화를 보시길 바란다) 때로 우리는 이것이 곧 ‘보.통.사.람’의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다고. 어떻게 그 많은 것에 일일이 신경 쓰느냐고.
오늘날의 구조적 문제들, 거대한 문제들을 보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제한되어 보인다. 세상 모든 문제에 우리가 다 신경을 쓸 수는 없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선택적으로 하기도 한다. 이러면 세상엔 잘못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시대가 문제이고, 정부가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떠넘기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 눈앞의 문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까지 외면하고 침묵해선 안 된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육식을 줄이고, 소비를 줄이고, 전기사용을 줄이고, 물을 아끼는 일은 소소해 보이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다. 구조적인 문제를 바꾸려면 사회를 바꿔야 하고,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을 바꿔야 하고, 그 구성원을 바꾸기 위해서는 각 개인이, 바로 내가 바뀌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 곧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사회 인식의 변화는 나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서 희망하지 않는다. 희망하기에 움직인다. 이번 사순 시기는 부디 내가 주저했던 행동을 손과 발로 움직일 수 있는 시기, 침묵하지 말아야 하는 순간 용기 내 말할 수 있는 시기가 되길 희망한다.
오현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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