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키려고 가짜 신부 행세를 한 최인길 마티아. 그림=탁희성 화백
1794년 12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 입국
‘진산사건’의 여파로 윤지충·권상연 외에도 고난을 겪은 이들이 있다. 먼저 한국 천주교회의 공동체를 함께 시작했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심문을 받고, 처음에는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다. 그러나 팔십 노모가 더는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이른바 겉으로는 서학에서 떠났다고 하는 ‘입술 배교’를 하게 되었고, 유배지는 충청도 예산현으로 바뀌었다. 그는 심문 중에 얻은 상처로 인해서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종하였다. 그리고 제사 거부에 동참한 이들로 정약종과 정철상 부자,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 황사영·이중배, 중인이었던 최창현·최인철 등이 있었다. 한편 초기 교회의 중심을 이루었던 양반 출신들인 이승훈·권철신·정약전·정약용·홍낙민·이가환 등은 제사 금령을 거부하고, 적어도 겉으로는 유교 사회의 전통을 고수하며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다.
진산사건의 충격은 서울보다는 지방에서 더 강했다. 그것은 국왕 정조가 영조에 이어 탕평 정책을 쓰고 있었고, 서학(西學)에 대해 ‘人其人 火其書’ 곧 ‘사람은 그 사람대로 대우해주고, 그 나쁜 책은 태운다’는 방식으로 비교적 온건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홍주에서 문초를 받았던 원시장은 1793년 충청도 지역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신해 진산사건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을 비롯하여 초기 교회의 주요 인물들은 천주교를 떠났고, 주로 중인과 일부 양반들(정약종·황사영 등)이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많은 서학서가 불태워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신자들은 다시 뜻을 모아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1794년 12월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천주교 공동체가 시작된 지 10여 년 만에 성직자를 모시게 되었다.
구베아 주교는 바로 성직자를 보내주기로 약속했었는데, 왜 한참 뒤에야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을까?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바오로)에게 약속을 한 후 마카오 출신 레메디오스 신부를 선교사로 파견하도록 준비하였다. 그러나 진산사건의 여파로 조선 신자들은 레메디오스 신부를 맞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대기하던 선교사는 병으로 선종하였고, 대신 북경에서 양성했던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게 되었다.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 초상화. 수원교구 어농성지
주문모 신부 입국 6개월 만에 밀고로 체포령
윤유일이 밀사로 성직자 영입을 도모하는 동안 한양에서는 중인 최인길(마티아)이 주문모 신부의 집을 마련하고 있었다. 윤유일과 지황(사바)의 안내로 주문모 신부는 마침내 한양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에게 조선 문화와 말을 가르쳐 준 이는 역관이었던 최인길이었다. 그 해 성주간에 고해성사와 부활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몇몇 대세(代洗)를 받은 이들에게는 보례(補禮), 즉 세례의 부족한 예식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해주는 예식이 추가되었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조선 신자들을 위한 정식 성사와 미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입국 6개월 만에 한영익이라는 예비신자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의 거처가 알려졌다. 포도대장 조규진은 1795년 6월 27일 주문모 신부 체포령을 내렸다. 다행히도 밀고자의 행동을 알게 된 교우들이 이 소식을 주 신부에게 알렸고, 최인길은 주 신부를 강완숙(골룸바)의 집으로 피신시킨 후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중국인은 어디 있느냐?” “나요.” 최인길은 마치 예수님이 병사에게 끌려가듯 주문모 신부를 대신하여 체포되었고, 윤유일과 지황도 함께 끌려가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 세 순교자에 대한 평가는 구베아 주교의 1797년 8월 15일 자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저와 이 북경 교회는 지난 1790년 윤 바오로가 북경을 두 번이나 다녀갔을 때, 윤 바오로의 신앙심과 경건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당시 윤 바오로가 어찌나 놀라울 정도로 열심한 마음과 모습으로 견진성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성체성사를 받던지, 북경의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윤 바오로가 신입 교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복음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완숙한 경지에 이른 오래된 천주교 신자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얼굴과 언행 그리고 덕망 있는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모두들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저희는 또한 지난 1793년 지 사바의 신앙심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 당시 지 사바는 북경에 40일간을 머물렀는데, 견진성사와 고해성사 및 성체성사를 눈물을 흘리면서 정말로 열심히 받았기 때문에 북경 교우들은 그 신심에 깊은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최 마티아의 경우는 북경에 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삶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저희는 조선에 간 선교사가 보낸 보고서를 통해 최 마티아는… 놀라운 열정과 믿음과 신심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복자 최인길(마티아) 초상화. 수원교구 어농성지
윤유일(바오로) 초상화. 수원교구 어농성지
복자 지황(사바) 초상화. 수원교구 어농성지
최인길·윤유일·지황, 체포 당일 옥에서 순교
최인길이 주문모 신부 대신 체포된 이후, 윤유일과 지황과 다른 교우 5명도 곧 체포되었다. 이들 교우 5명은 신부 영입에 참여하지 않은 관계로 석방됐다. 신앙이 굳세었던 세 명의 교우(최인길·윤유일·지황)는 고문을 견디다가 그날 밤 옥에서 처형됐고, 그 시신은 한강에 던져졌다. 그때가 1795년 6월 28일이었다.
지황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나타나지 않는데, 그의 집안은 단양(丹陽) 출신으로 그 아버지가 궁중 악사로서 고위직을 얻기까지 했다. 그도 아버지처럼 악사였고 서울에 살고 있었다. 천성이 순박하고 온화하며 근면하였고, 거기에 천주교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온몸으로 천주를 받아들였다. 이 3위의 순교자의 사건을 가리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 곧 ‘1795년 주문모 신부 체포 실패 사건’이라고 부르며, 그 장소를 가리켜 ‘북산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이후 주문모 신부는 매우 비밀리에 신자들을 방문했다. 낮에는 천주교 서적을 만들고, 밤에는 성사를 거행하면서 ‘회장제도’, ‘명도회’(선교와 교리연구 단체) 등 중국에서 활용했던 방식의 선교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4000여 명의 신자에서 1801년에는 1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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