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기술한 저자는 생명의 첫 시작을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에게서 찾는다. 모든 생명은 이 근원을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을 창세기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아담이 창조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비로소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존재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줄 때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하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는 권한을 인간 우월주의로 해석하는 잘못된 생각을 넘어서면 이 구절은 오늘날 생명이 처한 총체적 위기를 넘어설 길을 보여준다.
생명과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동일한 기원을 지니고 있다. 그 이후 생명체는 35~36억 년이라는 기나긴 역사를 통해 생멸변화를 거듭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생명은 참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삶의 과정을 보면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현대 문명은 그 생명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그 위기는 생명의 터전이 파괴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그를 넘어 생명이 절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로 치닫고 있다. 창조된 인간은 생명의 현재와 미래를 과제로 떠안았다. 생명의 역사 끝자락에 자리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생명의 현재는 물론 그 미래조차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생명이 파멸할지 아니면 새로운 모습으로 도약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다. 생명의 미래는 그 어느 책에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창조주는 인간에게 그 과제를 전적으로 위임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생명의 파멸인가 아니면 도약인가.
현대 문명은 17세기 이래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의 결과물이다. 후기 근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은 과학기술이 진리를 대변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가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서구에서 태동된 이 두 체제는 현대의 풍요로움과 민주적 세계를 가능하게 한 탁월한 체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 체계를 성찰하고 그에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생명이 생명으로 자리하고, 문명이 인간의 삶을 위한 체제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했다. 맹목적으로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안에 자리한 생명의 신비와 존재의미를 망각하게 되었다. 생명에 닥친 현재의 위기는 이렇게 생겨났다. 그 위기는 일차적으로 체제에 관계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생명의 의미와 신비를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생겨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생명의 위기를 벗어날 새로운 생각과 행동이다. 동일한 기원에서 시작된 모든 생명은 또한 동일한 메커니즘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생명은 모두 형제자매이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생명이다. 이는 생태적 선언이 아니라, 생명과학에 의해 밝혀진 과학적 사실이다. 모든 생명은 살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삶의 지향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 생명의 의지와 지향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행위가 뒤따르지 않으면 생명은 생명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생명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생명의 기원과 현재, 생명의 원리를 성찰함으로써 생명의 의미를 완성해야 한다. 그를 통해 생명이 파멸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도약시키는 것은 최초의 인간 아담 이래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과잉으로 치닫는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면 그 죄책을 어떻게 면할 수 있을까. 요한 23세 교종의 말씀을 빌려 말한다면, “생명과 삶을 원한다면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신승환 교수(스테파노, 가톨릭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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