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삶’에서 배운 건, 하느님 사랑과 의로운 경영
▲ 박희웅(오른쪽) 회장과 부인 허옥희 대표가 현진제업이 생산한 물품들을 앞에 두고
기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백영민
그는 삶을 두 번 살고 있다. 첫 번째 삶은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산 삶이었다. 두 번째 삶은 덤으로 사는 삶이다. 박희웅(요한 칸시오, 75) 현진제업 회장이 그 삶의 주인공이다.
경기도 안산 반월공업단지에 있는 (주)현진제업. 종이컵을 비롯한 각종 종이 식품용기와 종이컵 성형기까지 제작, 판매하는 기업이다. 1979년에 출범한 현진은 현재 직원 270여 명, 연 매출 700억의 탄탄한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체 기술로 개발한 종이컵 성형기는 전 세계 22개국에 판매되고 있으며, 현진은 2014년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세계 일류상품 인정서를 받았다.
자수성가, 열심히 발로 뛰며 일궈
박희웅 현진제업 회장은 충북 영동 출신이다. 시골에서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이른바 SKY에 합격했으나 학비를 낼 수 없어 4년 장학금을 주는 대학에 들어갔다. 가정교사와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활비 충당은 물론 저축까지 해 졸업 때는 작은 집까지 장만할 정도로 근면하고 열심히 살았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아내를 만났고 3년 열애 끝에 1969년 결혼했다. 당시 그는 선경(SK의 전신) 영업부에서 근무했다. 10년이 지난 1979년 퇴사하고 삼성자판기 판매 회사를 차렸다.
대기업 출신이 ‘창업하면 열에 아홉은 망한다’는 속설을 그는 흘려 넘기지 않았다. 대기업 ‘부장’이었다는 허울과 자판기 판매 회사 ‘사장’이라는 체면을 버렸다. 직원들보다 앞서 뛰었고 부지런히 뛰었다. 돈을 많이 벌었다. 여유 자금이 생기자 중고 배 두 척을 사서 원양어업을 시작했고 1983년에는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이 회사가 (주)아그네스 수산이다. 서울 서부종합시장에도 투자했다. 1989년 자금난에 허덕이던 종이컵 생산 판매 회사인 현진제업을 인수, 주력 기업으로 삼았다. 원양어업으로 번 돈을 현진에 쏟아부으며 기술 개발에 주력했고, 종이컵 성형기를 개발해 일본과 중국에 수출도 했다. 1995년에는 500만 불 수출 탑을 수상했다.
그러던 차에 IMF 외환 위기가 터졌다. 라면 컵 성형기를 개발해 놓았으나 판매가 되지 않아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파고는 험난했다. 세 회사 모두 부도가 났고, 부동산은 경매에 넘겨졌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을 보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회사를 살리고자 화의 신청을 하는 등 동분서주하며 움직였다. 어렵사리 화의가 받아들여져 회사가 살아날 길이 생겼는데, 박 회장은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2000년 1월 18일이었다. 혼수상태에 있다가 보름 만에 깨어났으나 우반신이 마비된 상태였다.
재활을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국내는 물론 중국까지 곳곳을 찾아다녔다. 악재는 한꺼번에 닥친다고 했던가. 재산을 탐낸 가까운 친척과 친구의 배신까지 겪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회사를 운영해야 했다.
지켜보다 못해 아내(허옥희 아녜스, 71)가 거들었다. 원양어업 회사의 대표를 맡았다. 그는 1956년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을 저격한 주역 허태영 대령의 맏딸이다. 사형수로 감옥에 있으면서 사도 법관 김홍섭(바오로, 1915~1965) 판사의 인도로 가톨릭을 알게 된 허 대령은 가족들에게 가톨릭 귀의를 권했고, 허 대표는 13살 때에 김홍섭 판사의 부인 김자선(엘리사벳) 여사를 대모로 세례를 받았다.
결혼 후 30년 동안 네 아이를 키우며 성당 활동이나 봉사 활동이 거의 전부였던 허 대표는 늘 ‘지혜와 겸손을 달라’고 기도하며 회사를 운영했다. 2006년에는 회사 이름을 자신의 세례명을 따 ‘아그네스 수산’으로 바꿨다.
박희웅 회장의 의지는 놀라웠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재활에 힘쓰면서도 현진제업을 비롯한 회사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현장에는 잘 나가지 못하는 대신 집에서 전화로 업무를 처리했다. 2009년 마침내 모든 회사가 흑자를 냈다. 그러면서 박 회장은 삶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했다.
“쓰러지기 전에는 내가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했으니까요. 그런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왜 나를 살려주셨을까 하고 곰곰 생각하게 됐습니다.”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회사를 잘 안정시키고 의롭게 이끌어가라는 것이었다. 세례받은 후 평생 신앙 속에 살아온 아내 허 대표와 달리 박 회장은 관면혼배를 했지만, 결혼 후에도 아내가 성당에 가는 것조차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딸만 셋 보고는 아들을 낳으면 성당에 가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했고, 마침내 막내아들을 본 후 그 약속을 지키려고 세례를 받았지만, 일이 먼저였고 하느님은 늘 두 번째였다.
“‘내가 천국에 간다면 내 마누라 치마꼬리나 붙잡고 가야지!’ 하며 아내를 뒤에서 도와주기는 했지만, 하느님을 첫째로 섬기지 못했음을 깨닫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지요.”
박 회장 말처럼, 신앙생활이나 남을 돕는 일은 거의 전부가 부인 허 대표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돕는 일도 함께하기로 했다. 먼저 시작한 것은 기도. 특히 부부는 매일 묵주기도 5단씩은 꼭 함께 바친다. 박 회장의 투병 생활과 함께 시작했으니 10년이 훨씬 넘었다. 10여 년 전 예수성심전교수녀회 재속회원이 된 아내를 따라 같이 재속회원도 됐다.
하느님 섬기는 것이 먼저
박 회장 부부는 2007년 ‘사회복지법인 아그네스 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장애인들이 자신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통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만든 법인이다. 재단은 2010년 장애인 근로자 작업장 행복주식회사를 통해 이 목표를 구체화하고 있다. 행복주식회사에서는 현재 장애인 40여 명이 복사용지 절단 판매, 김치 생산, 쌀 도정, 현수막·명함·제본 사업 등을 통해 자활을 도모한다.
지금도 부축을 받아야만 거동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불편한 박희웅 회장은 하루 수십 차례 전화기를 잡고 회사 운영을 지휘한다. 하지만 쓰러지기 전과 달라진 게 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먼저라는 것, 또 회사 경영은 회사가 의로운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지금 사는 삶은 ‘덤으로 주어진 삶’이기에.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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