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사랑을 증거하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하나이다.
죽음의 골짜기
오래전 병마가 나에게 침입하기 전의 신앙생활은 솜사탕같이 달콤하고 바위같이 굳건하였다. 온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여하러 갈 때는 천국을 사는 듯한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마귀가 시샘이라도 하듯 설마 했던 걱정거리가 진한 아픔을 안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로 닥치고 말았다.
의사로부터 “간경변이 많이 진행되었습니다”란 진단 결과를 듣는 순간,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고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여보! 여보!”하는 아내 젬마의 울음 섞인 소리를 들으며, “이제 나는 다 끝났구나, 다 끝났어!” 탄식만 나도 모르게 간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젬마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꽂은 채 있자, 사랑하는 젬마, 귀여운 두 딸 그리고 장남인 나를 자랑삼아 고향에서 노후를 즐겁게 보내고 계시는 부모님의 얼굴이 차례로 그려졌다. ‘이제 모두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독백을 하면서 생각을 끊어버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건강 걱정, 생계비 걱정 그리고 불길한 생각으로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방 저 방 다니며 가족들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죄스러운 마음에 보상이라도 하듯 이불을 덮어주곤 했다. 욕실에 갈 때마다, 검어져 가는 얼굴 빛깔을 인정할 수가 없어 몇 번이고 세수를 해보아도 틀림없는 나의 얼굴이라, 두려움에 휩싸여 사지가 후들후들 떨릴 때가 많았다. 성체 앞에 엎드려 “주님! 제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까? 저의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저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원망 반 애원 반의 기도를 드리며 안정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침묵만 지키시는 주님을 체험하며, 지진에 빌딩 무너지듯 믿음도 무너지는 것 같았고, 나에 대한 가족들의 지극한 간호도 다 부질없이 보였으며 다정한 이웃의 격려도 그저 인사치레로만 받아들여졌다. 모두가 떠나버린 듯한 적막 속에서 한 쓸모없는 인간이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 앞에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흐느끼고 있는 처량한 모습만 보였다. 이 와중에 ‘병마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라는 문제를 놓고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 젬마와 큰 차이를 드러내면서는 외딴 섬에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더욱 외롭고 두려우며 암담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특효약이 없을까? 효험 있는 치료방법이 없을까?’미사 참여도 거부한 채 이곳저곳 서점을 뒤지기도 하고, 또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치료방법을 찾는 것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젬마는 사흘이 멀다고 밤샘기도회를 다니며 남편의 치유를 간구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 어쩐지 나와는 다른 타인으로 여겨졌다. 젬마는 기도회나 피정을 다녀와서 신앙적인 말씀들을 나에게 전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한 나에겐, 먼 나라의 신화 같은 얘기로만 들렸고 설 익은 감을 먹었을 때처럼 떨떠름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스로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자만심에 꽉 차 있었던 나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지 두렵고 무기력하고 초조한 느낌 속에 휩싸여 있었다. ‘마음은 괴롭고 고독하고, 육신의 질병은 심해져만 가고, 되는 일은 없고…. 아! 내가 왜 이런가?’ 죽음의 골짜기에서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으며 혼자 끙끙 앓았다.
희망의 밧줄
그러던 어느 날, 젬마가 “함께 밤샘기도회에 갑시다”라고 권유했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잘못되어 죽고 나면 젬마가 그토록 애원하는 기도회에 한 번 가주지 못한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하는 생각과 죽은 사람 원도 들어주는데 젬마에게 후회가 없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선심 쓰듯 따라나섰다. 기도회에서 젬마가, “주님! 제가 미카엘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겠으니 미카엘을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미카엘에게 주님 계심을 알게 해주십시오!” 라며 울부짖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젬마가 저렇게도 나를 위해 희생을 다하는데, 나는 젬마를 위해 무얼 했나? 마음에 상처만 주고 고생만 시키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나를 흐느끼게 하였다. 주님 밖에서 오만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게 한 회개였으며, 필요에 따라 입었다 벗었다 하는 양복저고리 같은 신앙에 대한 통회의 눈물이었다.
그때부터, 나와 젬마는 유일한 희망의 밧줄로 주님을 굳게 붙잡았다. 함께 열심히 기도회에 다녔고, 매일 미사에 참여했고 늘 기도하는 생활을 추구해 나갔다. 또한, 매일 성경 묵상을 통하여 말씀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길어 올리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성경 말씀 속에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을 발견했을 때는 기쁨에 겨워 온 집안을 춤추듯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어느새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주님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되니, 육신의 고통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믿음으로 이겨나갈 수 있었다. 성경 말씀의 한마디 한마디는 곧 생명의 길이었다.
시편 23장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중략)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말씀을 암송하여 읊으니, 가는 목소리가 굵은 목소리로 바뀌며 온몸에 생기가 돌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갔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마태 18,20) 말씀에 따라 우리 부부는 오직 기도로 함께 주님께 매달렸다.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5) 말씀에 따라 기도할 때, 나는 건강할 때의 나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고 감사의 기도를 먼저 드리곤 했다.
미끄러져 간 밧줄
하지만 간경변이 심해져 혈류가 간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역으로 흘러 식도의 정맥류로 빠져나옴에 따라 실핏줄이 고무풍선같이 불어나는 식도정맥류가 발생했다. 자칫하면 실핏줄이 터져 한 시간 내 봉합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의사도 더는 뚜렷한 치료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겨우 잡은 주님께의 희망의 밧줄에서 손이 맥없이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었다.
한밤중에 가족들이 잠든 틈을 타, 유언서를 작성하려고 노트 두 권을 꺼내 각 권에 제목을 썼다. ‘사랑하는 아내, 젬마에게’, ‘사랑하는 나의 두 딸에게’. 그러나 제목 외엔 한 글자도 더는 쓸 수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이 세상을 결코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펜을 놓게 하였다. ‘그렇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믿고 더욱 매달리자!’고 나는 다시금 철석같이 다짐했다.
주님 만남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세상 끝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말씀은 주님께로의 희망의 밧줄을 다시 굳게 붙잡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다시금 주님에 대한 믿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 이웃 교우들의 사랑은 백만 원군 같은 힘이 되어 주었다. 함께 투병을 한 이웃의 아녜스 자매는 자신도 불면증에 걸려 애를 먹고 있었지만 내가 고통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고, 주님께 “미카엘에게 자신의 잠을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해주었다. 특히 본당 ME 가족들은 1년 동안 매주 금요일 밤 우리 집에 와서 함께 기도해 주었다. 그 모든 기도와 사랑은 유일한 희망의 밧줄인 주님을 더욱 굳세게 잡게 해주었다.
신약성경 속에서 예수님이 환자를 치유하신 사례 26가지를 뽑아, 환자와 예수님의 대화록을 만들어 보았다. 분석한 결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또 하나는 측은한 마음에서 예수님은 치유시켜 주셨다. 그래서 나는 믿음으로 주님께 바짝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매일 바치는 묵주기도의 어느 감사기도 시작 날 밤엔, 환시 속에 성체를 보름달같이 환하게 보여주셨다. 이는 나의 고통에 함께하고 계심을 확실하게 믿게 해주셨고, 매일 미사에 참여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여져 그 후 빠짐없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이웃의 사랑, 성경 말씀, 기도 그리고 환시 속에서 나는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심을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러자 삶의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죽음을 이긴 사랑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서울에 올라와 3년여 동안 다녔던 Y병원 주치의는, “간경변 시한부 6개월 정도의 말기입니다. 이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마지막 방법은 간이식인데 이 병원에서는 안 됩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 결과를 말해 주었다. 순간 많이 놀랐지만,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이미 체험한 나로서는 주님께서 반드시 살려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젬마와 함께 곧바로 성당에 달려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님, 두렵습니다. 간이식밖에는 방법이 없는가요? 이 방법은 또 성공할 수 있는가요? 제 모든 것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오니 주님 뜻대로 하소서.” 한참 동안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의 평화를 가까스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겹겹의 장벽으로 앞을 막고 있었다.
마지막 방법인 간이식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으면서도 수술에 대해 몇 가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우선 수술의 성공 여부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또한 거액의 수술비는 어떻게 마련하며, 간 기증자를 구할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마침 어느 TV 방송에서 간이식 명의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수술의 성공 여부에 대한 불안감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돈 문제도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는 등 이런저런 방법을 찾으면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간 기증 문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수술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또다시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눈치챈 젬마가, “무엇이 걱정입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당신을 살리겠습니다. 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시다”라고 말해 주었을 때, 수호천사가 말해 주는 듯 새로운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기로 재결심하고 기도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즈음 어느 날 대학교 1년생인 큰딸 클라우디아가 내가 간이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클라우디아는 인터넷에서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간경변 환자의 간 사진을 확인하고는, ‘아빠가 이런 지경이시라니, 아빠와 내가 혈액형이 같으니 내 간을 드리면 되겠구나’라고 결심했다. 다음날 클라우디아는 학교에 가기 전, 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빠, 간이식 수술하세요. 제 간을 드릴게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을 발견했을 때처럼 내 눈이 번쩍 띄었다. 부모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자신의 간 일부를 아빠에게 주겠다고 나선 큰딸의 마음은 기특하고 고마웠지만 순간 시집도 안 간 딸의 배를 가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래, 고맙다. 그렇지만 어찌 어린 네 배를 가르겠느냐? 두고 보자”하며 큰딸을 달랬다. 간이식을 해야 한다는 소식은 나의 네 명의 동생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리고 큰딸이 간 기증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은 동생들은 자신들이 간 기증을 하겠다고 했다. 동생 진영은 회사 휴직계를 내고 단숨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나는 동생들이 큰딸은 처녀이기에 배를 가르면 안 된다며 서로 간을 내놓겠다고 하는 모습에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고, 그러므로 나는 분명 살 수 있겠다고 확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생 진영의 간 정밀검사 결과 좌우엽 간의 비율이 맞지 않아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자 다른 동생들도 나서고 큰딸도 강한 의사를 표현했다. 그래서 나는 “정밀 검사하여 가장 좋은 간으로 하자”고 했는데, 그 검사 결과 모두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죽음의 골짜기에 드리운 한 가닥 희망의 밧줄을 잡고 겨우 올라왔는데, 다시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듯한 절망감으로 한동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성체조배로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현존 체험 주신 주님은 반드시 길을 주실 것이다’란 믿음으로 다시 기도에 매달렸다. “주님, 의료진에게 지혜를 주시어 저를 살려주세요.” 며칠 후 의료진으로부터 제안이 왔다. “두 사람 간을 가지고 해봅시다. 이 방법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세계 최초의 방법입니다.” 눈이 번쩍 뜨인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그 이야기는 수술의 성공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의료진에게 “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주님께 먼저 기도하고 답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온종일 기도를 바쳤다. “주님, 방법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오니 수술에 함께하시어 건강을 도로 주소서! 혹 주님의 뜻이 저를 데려갈 양이면 주님 뜻대로 하소서. 그리고 우리 가족들을 돌보아 주소서!” 기도하고 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당시 나는 육신의 생명을 넘어 구원의 은총을 주님께서 이미 주셨음을 믿었기에 더는 육신의 생명에 연연하지 않았다. 의료진에게 답변하였다. “두 사람 간으로 해봅시다.”
이렇게 하여, 의사에게 매일 자신의 간으로 해달라고 매달린 큰딸과 다시 휴직계를 내고 단숨에 달려온 동생 진영이 수술을 받게 됐다. 한 사람마다 간이식 수술이 20여 시간 동안 있었고, 수술 이틀째 아침 9시에 나는 눈을 떠 빛을 보았다.
“아, 내가 살았구나! 주님, 감사합니다!” 탄성과 기도가 절로 터져 나왔다. 십여 년간의 투병 중 시한부 마지막 절박한 시점에서 맛본 통쾌한 사랑의 승리였다. 주님을 굳게굳게 믿고 간절한 바람으로 끊임없이 기도로 매달린 끝에,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베풀어주신 크나큰 은총이었다. 중환자실서 사흘을 지낸 뒤 무균실에서 재회한 젬마와 나는 어깨동무하여 병원 복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성가 447번 ‘찬미 예수님’을 노래했다. 그리고 시편 40장의 다윗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시고 (중략) 우리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담아 주셨네.” 언론에선 세계 최초의 2:1 듀얼 생체 부분 간이식 수술이 성공하였다고 난리였지만, 나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감격에 겨워 울먹이며, 때로는 춤추듯 드렸다.
소생(蘇生)의 삶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하고 있던 어느 날, 나의 고통의 시기에 많은 기도와 격려를 주신 당시 청주교구장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님께 전화로 감사 인사를 드렸다. 주교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미카엘 형제 축하해요. 성경에 죽은 라자로를 주님이 살려 주셨는데, 그 후 라자로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어요. 미카엘 형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래요?”라고 질문하셨다. 나는 순간 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주님께서 살려주신 것에 들떠 마냥 기쁘기만 했는데 이제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것인지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진지하게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나는 그 답을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에 주교님을 찾아뵙고 말씀드렸다. “사랑하기와 감사하기입니다.” 살아난 이후 실제 그렇게 노력해 온 삶이었기에 자신 있게 말씀드렸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은총을 체험했기에 인터넷 카페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를 개설하여 기도를 부탁하는 분들과 기도를 봉헌하는 분들이 함께 사랑을 나누는 마당을 만들었고 현재 회원 4천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ME(매리지 엔카운터)의 발표팀으로 봉사하며 부부 일치를 위해 헌신하였다. 중간에 젬마의 가게 일로 ME 봉사를 중단해야 하는 때에 우리는 아주 잘 되던 가게를 과감히 정리하고 봉사를 계속해 나갔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신앙체험을 나누는 기회가 있는 때엔, 나는 만사를 제치고 어디든 기꺼이 나섰다. 하느님의 함께하심을 증거하는 일은 내가 다시 사는 소중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어려움으로 일부 신자가 성당에 나오지 않는 때인 요즘에도 우리 부부는 더욱더 매일 미사 참여와 성경 말씀 묵상과 기도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본당 ME 대표, 레지오 활동, 아내 젬마의 제대회 회장, 나의 성인 복사 등 성당에서 필요한 봉사에도 순명하며 기꺼이 임하고 있다. 최근 괴산 지방에 수해가 났을 때, 나는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크게 손실을 본 여러 집을 돌아다니며 복구 작업에 힘썼다. 암 투병을 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 자매에게 우리 부부는 하느님의 함께하심 체험담을 들려주며 선종할 때까지 주님 안에 머물도록 돌봐 주었고 그 후 홀로 남은 형제의 뒷바라지에도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건강치 못한 내가 봉사에 열심인 모습을 본 많은 교우가 만류하여도, 나는 그동안 받은 주님의 은총을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마음으로 나선다. 나의 굳건한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보며 이웃 교우가 더욱 신앙생활에 충실한 모습을 보일 때엔 뿌듯함을 느낀다. 페이스북 등 SNS 활동을 통하여도 신앙생활의 기쁨을 나누고 믿음을 증거하는 데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도 건강 문제로 병원을 가끔 들락거리며 때로는 입원할 때도 있다. 하지만 병원 그 자체 또한 선교와 기도의 터가 된다. 내가 있는 곳 그 어디든,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 나는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굳게 믿기에 두려움을 떨치고 희망의 웃음이 얼굴에 피어오른다. 고통이 없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이기는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린다.
증언하라
긴 투병 생활은 분명 고통의 시기였지만, 하느님께 믿음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하느님의 현존하심과 늘 함께하시는 사랑을 깊게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기도 했다. 믿는 만큼 더 가까이에서 주님의 숨결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인생 최고의 축복 시간이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 4,8) 말씀이 나에게서 뚜렷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 주신 값진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하느님 현존하심과 늘 우리 각자와 함께하심을 증언하는 일’을 더 살아야 하는 소중한 새 사명으로 삼았다. 그래서 건강상 퇴직했던 과거 직장에서 사업을 제의해 왔지만 거절했다. 돈을 더 벌려고 동생과 딸의 간을 받아 가며 생명을 연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또한 나의 새 사명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았다. 나의 핵심역량인 경영혁신 컨설팅을 선택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일을 업무 외적으로 간간이 들려줄 수 있었다. 새 사명을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수행하기 위해선 나의 영적 성장이 절실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살았던 경기도 분당을 떠나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이사했다. 더욱 자연 가까이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며 영적 성장을 꾀해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영적 일기를 지속적으로 써오면서 나의 생활을 늘 성찰하며 주님 안에 머무르는 노력에 정성을 다해 왔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가는 교우를 만날 때, 또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세속적 욕망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날 때, 나의 신앙체험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하며 열정적으로 증언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늘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굳게 믿으면 필요한 은총을 하느님 뜻 따라 반드시 베풀어주십니다.”
증언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삶 자체다. 내가 신자답게 살지 못하면서 하느님을 말씀하는 것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주님 안에 머물면서 ‘사랑하기와 감사하기’를 실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품고 기쁘게 사는 모습 그 자체가 최상의 선교요, 증언이라 여기고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 나를 위해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과 사랑을 증거하는 이 ‘기록’을 하느님께 오롯이 봉헌하며 기도드린다. “하느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이제와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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