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에 대한 험담을 서슴지 않았던 하비에르 밀레이(53)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에게 11월 21일 먼저 전화를 걸어 당선을 축하했다. 그가 2차 결선 투표에서 56% 지지를 얻어 당선인으로 확정된 지 이틀만이다.
밀레이 당선인은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극우 자유주의 성향의 새내기 정치인이다. 중앙은행 해체, 공기업 민영화, 장기매매 허용 등 과격한 공약을 내걸고 대선에 뛰어들었다. 정부의 방만한 지출을 쳐내겠다며 전기톱을 들고 유세장을 누벼 이목을 끌었다. 또 의료ㆍ교육ㆍ사회개발 분야의 공공지출을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장기이식 희망자의 대기 시간을 줄이기 위해 “시장 메커니즘을 찾아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무정부주의적 시장경제주의자에 가깝다.
‘반 교황’ 후보 당선
특히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교회와 대립각을 세우는 사이에 ‘반 교황(Anti-Pope)’ 후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그는 정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가톨릭 사회교리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사회 약자를 옹호하는 교황을 향해 ‘망할 공산주의자’, ‘악의 축’, ‘예수는 세금을 내지 않는다’ 등 대선 출마자로서는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을 쏟아냈다. 이 때문에 젊은 신부들, 특히 사회사목 담당 신부들은 낙선운동에 가까운 집회를 열어 그를 반대했다.
교황은 1차 투표 전에 포퓰리즘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아르헨티나 공영 라디오 인터뷰에서 독일의 유명한 전래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를 언급했다. 동화 속 사나이는 도시를 괴롭히는 쥐떼를 피리 소리로 불러내 강물 속에 처넣었다. 하지만 시장이 약속을 어기자 도시의 아이들을 피리 소리로 꾀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교황은 “경제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으로 국민을 현혹해 물에 빠뜨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밀레이 후보를 특정하지는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가톨릭 국가다. 교황의 조국이라는 국민들 자부심도 강하다. 그럼에도 밀레이 후보가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것은 국민들이 반복되는 경제 위기와 살인적 인플레이션에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교황 측근에 따르면 교황과 밀레이 당선인 간 전화 통화는 원만했다. 교황은 당선을 축하한 뒤 “보건ㆍ교육ㆍ빈곤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 만큼 “지혜와 용기를 갖고 일해나가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밀레이 당선자는 자신이 계획한 변화는 “국민들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라며 기도를 부탁했다. 이어 “바티칸시국 수반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수장으로서 내년에 아르헨티나를 방문하길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그는 8분간의 통화 내내 교황을 ‘성하(Su Santidad)’라고 존칭했다.
새 정부와 교회 간 긴장 불가피
교황의 유화적 제스처와 달리 신부들은 새 대통령에 대한 우려를 숨기지 않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 종교 간 대화 담당 카를로스 화이트 신부는 “상황이 매우 혼란스럽다. 우리는 언제나 국민들 뜻을 존중해야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확실하다”고 밝혔다. 빈민 사목을 하는 베디아 신부는 “빈민가 사람들은 선거 결과를 보고 놀랐고, 슬펐고, 두려웠다”며 “모순된 말을 많이 한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달 10일 출범하는 밀레이 정부와 가톨릭교회 간에 당분간 긴장 기류가 흐를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은 교회의 사회사목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주교회의 의장 오스카 오헤아 주교는 당선인 확정 직후 SNS를 통해 “유권자들이 참여한 민주주의의 날을 소중히 생각한다”며 “새로 선출된 당국자들을 깨우쳐 달라고(to enlighten) 주님께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주교회의는 정치적 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그의 반교회적 유세에 직접적 대응을 자제해왔다. 한 신부는 “새 정부는 대선 기간에 간극이 더 크게 벌어진 정치적 양극화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정치적 양극화와 선거운동에서의 종교적 담론은 아르헨티나만의 상황은 아니다. 룰라(현 3선 대통령)와 보우소나루가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인 지난해 10월 브라질 대선에서도 유사한 소란이 있었다.
김원철 선임기자 wckim@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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