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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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위령성월 이야기

참 빛 사랑 2014. 10. 30. 17:24

 

 

[위령성월(11월) 이야기]-죽은 이들을 위해 언제부터 기도했을까?

2세기부터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널리 퍼져 연혹 영혼 기억하며 자신의 삶·신앙 돌아봐야


▲ 그리스도인은 위령성월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긴다. 사진은 신자들이 서울 용산 성직자묘역에서 세상을 떠난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평화신문 자료사진

 


 오늘 독서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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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열 시에 본당 묘지에서 위령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해마다 11월 1일이나 2일은 이렇게 묘지에 본당 가족들이 모여 위령미사를 봉헌합니다.
가족 묘를 하나하나 돌며 향을 피우고 성수를 뿌리고 조용히 기도를 바칩니다.
다 돌고 나면 묘지 제일 위쪽에 마련된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제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탁 트인 하늘과 작은 도시의 풍경, 소리 없이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이는 그림입니다.
저 멀리에는 어렴풋이 후지산(富士山)의 정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지금 이 시간에는 미사를 준비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여 묘지 주변의 잡초를 뽑으며 주변을 정리하고들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를 봉헌한 후, 모두가 환한 얼굴로 단체사진을 찍을 것입니다.

위령성월(慰靈聖月)입니다.
언젠가 말씀 드렸듯이, 우리의 삶이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성숙한 삶의 내용을 이루어낼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생로병사라는 간단한 도식에 대한 막연한 이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한 묵상과 현재의 삶에 대한 관조가 없이는 우리는 그저 흘러가는 삶을 살다가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와 덧없이 살다가 덧없이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바른 의미를 찾아 열심히 보람된 기억을 남기면서, 절대적 희망을 품고 마무리해야 하는 여행길입니다.
부지불식간이란 표현이 실감날 정도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빨리 흘러갑니다.
그 빠른 시간은, 귀하게 여기는 마음들에게만 희망을 허락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요한1서는 그 희망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3,2)

다시 찾아온 위령성월,
갈길 재촉하는 가을을 바라보며, 반드시 생각해야만 할 것들을 무게를 실어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벗들, 그 밖의 관계들 속의 나.
지금 좇고 있는 것과 나.
진정 희망해야 할 것과 나.
그리고
하느님과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11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이다.

위령성월을 맞아 위령성월의 유래와 함께 죽음에 관한 교회 가르침을 살펴본다.





위령성월 유래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관련된 기록은 구약성경 마카베오기에 나온다. 기원전 2세기 유다 지도자 마카베오는 전쟁터에서 죽은 유다인들의 장사를 지내면서 그들이 지은 죄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기도와 헌금을 바쳤다.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5).

서기 2세기부터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널리 퍼졌다. 초대 교회 로마 카타콤바(지하묘지) 안에 새겨진 기도문에는 죽은 이들이 죄를 용서받고 천상 행복에 들게 해달라는 내용이 많았다.

교회는 이러한 관행을 연옥 교리로 본격적으로 발전시켰다. 세상을 떠난 이들이 천국에 들기 전 자신의 죄를 깨끗이 씻는 상태를 뜻하는 연옥은 13세기 리용공의회와 15세기 피렌체공의회를 거쳐 1545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공식 가르침으로 선포됐다.

이에 앞서 609년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은 11월 1일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정하고 이날에 교회력에 축일이 따로 없는 성인들을 기억하도록 했다. 이후 998년 프랑스 클뤼니수도원 오딜로 원장은 모든 성일 대축일 다음 날인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했고, 이런 관습이 확산하면서 11월을 위령성월로 지내게 됐다.



죽음에 관한 교회 가르침

가톨릭교회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죽음은 이 세상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관문이기에 적극적 자세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죽음관이다.

교회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후에 세 가지 상황 가운데 하나에 처하게 된다. △하느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거나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 (천국) △하느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 (연옥)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거부한 사람은 영원한 벌을 받는다. (지옥)

이처럼 개별 심판(사심판)을 받은 인간은 세상 종말이 오면,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면 모두 부활해 최후 심판(공심판)을 받는다. 이때 육체와 영혼이 영광스럽게 된 의인들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지만 악인은 단죄를 받게 된다. 종말의 시기와 방법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이러한 교회 가르침을 다시 쉽게 푼다면, 인간은 죽어서 하느님과 만난다.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전 생애가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것을 체험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파노라마처럼 적나라하게 되돌아보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연옥은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하며 후회와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대면하는 정화의 과정이다. 생전에 죄를 지은 것이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며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상태가 바로 연옥이다. 연옥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고 정화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기대어 하느님과의 일치, 즉 천국을 희망한다. 교회는 연옥 영혼이 최후 심판 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바쳐온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이다. 연옥 영혼들은 지상에서 살고 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 선행 등으로 도움을 받는다. 이른바 ‘통공’ (通功) 신앙이다.

천국, 곧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복락을 누리는 어떤 곳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룸으로써 누리는 충만한 기쁨의 상태다. 이를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 부른다. 반면 지옥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이웃을 거부한 인간이 절망과 악의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현세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것처럼 지옥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최후 심판, 즉 종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이기에 인간이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종말 때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을 믿을 뿐이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천국과 지옥이 내세의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라고 한다면 천국과 지옥은 이미 현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완성될 종말에 희망을 거는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하느님을 만날 것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한 가운데 종말에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둔다. 이 희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죽는 그 순간까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위령성월에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된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연스럽게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게 되고, 이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신앙생활에 더욱 충실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위령성월을 맞아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두 손을 모아야겠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묵주기도 성월(10월)

묵주기도로 이단 격퇴 전쟁 승리한 데서 유래, 교황 레오 13세가 정해 발표

 

 

교회는 1년 중 특별히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정해 묵주기도를 즐겨 바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묵상하며 성모님께 특별한 공경을 드립니다. 묵주기도에 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기에(919호~920호, 2007년 5월 6일자~13일자), 여기에서는 묵주기도 성월의 유래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봅니다.
교회가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공적으로 지내기 시작한 것은 1883년 교황 레오 13세(재위 1878~1905)가 회칙 「최고 사도직무」(Supremi apostolatus)를 발표해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지내도록 함으로써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지내도록 한 것은 교회 전례력에서 10월 7일에 지내는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571년 10월 7일에 오늘날 그리스 영해인 코린토만(灣) 부근 레판토에서 그리스도교 동맹군과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큰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 동맹군은 성모 마리아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며 전장으로 나아갔고, 10월의 첫번째 주일이었던 이날 로마에서는 묵주기도회 회원들이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행렬을 했다고 합니다. 그 덕분인지 이날 그리스도교 동맹군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황 성 비오 5세(1566~1572)는 이를 기념해 10월 7일을 '묵주기도의 성모' 또는 '승리의 성모'께 특별한 공경을 바치는 날로 기념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전례력에서 기념하고 있는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의 기원이지요.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최고 사도직무」에서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지내기로 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16세기 레판토 해전에서 그리스도교 동맹군이 이슬람제국 군대를 물리친 것이나, 그 이전 12세기 말에 알비파 이단이 득세했을 때에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설자인 도미니코(1170~1221) 성인이 도입한 묵주기도를 통해 이단을 물리쳤던 일 등을 상기시켰습니다. 레오 13세 교황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묵주기도를 통해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청함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했음을 일깨우면서 19세기 극심한 혼란 속에서 위기에 처해 있던 교회를 묵주기도를 통해 극복하고자 10월을 묵주기도 성월로 지내도록 한 것입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을 맞아 우리 자신과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국가 사회와 인류 공동체를 위해서 특별히 평화의 모후이신 동정 마리아의 도우심을 청하며 정성을 다해 자주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합시다.

 

 

알아둡시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개인으로나 단체로 묵주기도를 자주 열심히 바치도록 권장합니다. 그런데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친다며 미사 중에도 묵주알을 굴리는 신자들 모습을 이따끔씩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미사는 교회가 하느님께 바치는 공적 예배인 전례입니다. 그러나 묵주기도는 매우 아름답고 중요한 기도이지만 전례가 아니라 신심기도에 속합니다. 따라서 미사 중에 신심기도인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이는 비단 미사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와 견진 등 모든 전례 행사가 있을 때는 그 전례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 때에도 전례와는 별도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전례를 잘 준비하기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 미사를 드리기 전에 신자들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권장할 일이기도 합니다. 묵주기도는 전례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전례에로 이끄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