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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1942년 12월 20일 노기남 주교 성성… 한국인 최초의 주교 탄생

참 빛 사랑 2024. 10. 4. 14:16
 
노기남 대주교가 1942년 12월 20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한국인 첫 주교로 성성식을 마친 후 신자들에게 첫 강복을 주고 있다.

일제, 천주교계에 신사참배 강요

일제는 1920년대부터 천주교계에 신사(神社) 참배를 강요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천황의 사진에 경례하는 것은 미신이 아니지만, 신사에서 행해지는 예식에 참배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1925년에 간행된 「천주교요리(天主敎要理)」와 1932년 반포된 「조선 선교지 공동지도서」에도 명시적으로 신사참배 금지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교회가 신사참배를 금지한 이유는 이를 ‘이교 숭배 의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를 합법화하기 위해 교회법을 적용하여 ‘악표양의 위험이 없다면 신자가 비신자의 예식에 참석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점을 이용해 신사참배를 가능토록 했고, 마침내 교황청에 정식으로 청원하여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고, 애국심을 표현하기 위한 국민의례임을 인정받도록 했다.

1936년 교황청은 신사 참배를 ‘시민적인 예식’으로 규정하였고, 1939년에는 공자 참배의 허락과 조상제사를 허용하는 훈령도 발표하였다. 이로써 긴 박해의 명분이 되었던 조상제사는 사회적 의례로 허용됐고, 교회는 신앙의 진리가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제사에 대한 의식이 변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1942년 1월 18일 서울대목구장 착좌식 당시 노기남 대주교. 「노기남 대주교 화보집」에서 발췌

라리보 주교, 후임으로 노기남 신부 추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위해 한국인을 총동원했고, 한국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 과정에서 외국인이 맡고 있던 주요 기관의 단체장을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하고, 한반도의 대목구장들도 모두 일본인 성직자로 교체하고 있었다. 서울대목구장이었던 라리보(元亨根, Larribeau, Adrien Joseph, 1883~1974) 주교는 일본 천주교회와 한반도 지역의 교구장들이 모두 일본인 성직자로 교체되고 있을 때, 자신의 후임으로 명동본당 보좌로 있던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1902~1984) 신부를 추천했다.

1930년부터 1942년 1월까지 명동 보좌로 있었던 노기남 신부는 주임이었던 비에모(禹一模, Villemot, Marie Pierre Paul, 1869~1950) 신부 밑에서 다양한 성무활동을 펼치고 각종 단체의 지도 신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노기남 신부를 추천한 이유는 당시 서울대목구 상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데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리보 주교는 당시 일제가 반발할 것을 예상하여 이 일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1941년 라리보 주교는 비서였던 오기선 신부를 일본에 보내 주일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를 만나게 하였다. 대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인 대목구장을 추천했고, 마렐라 대주교는 라리보 주교에게 1942년 1월 3일 자로 답장을 주었다.

“저는 서울교구를 한국인 신부에게 맡겨야 할 시기가 왔다는 주교님의 이 확신을 곧바로 전보를 통해 바티칸에 알렸습니다. 오늘 그 답신을 받았습니다. 교황청은 주교님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성좌의 지시에 따라’ 오카모토 테츠지(노기남) 신부를 대목구장 서리에 임명합니다.”
 
주교 서품식 후 복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노기남 대주교. 미사 복사를 한 정진석(왼쪽 앞 소년)은 훗날 서울대교구장이 된다. 「노기남 대주교 화보집」에서 발췌

1942년 1월 18일 서울대목구장 서리 취임

그리하여 노기남 신부는 서울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됨과 동시에 평양대목구와 춘천지목구의 재치권까지 함께 맡게 되었다. 1942년 1월 11일 평양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노기남 신부는 라리보 주교의 호출을 받고, 대목구장 서리 임명 소식을 듣게 되었다. 1월 18일 한국인 신부들로 구성된 참사회가 구성되었고, 대목구장 서리 취임식을 했다. 이후 황해도 감목대리구의 폐지를 결정하고, 선교사의 구금으로 사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평양대목구와 춘천지목구에 서울대목구 소속 신부들을 파견하기로 했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이 막 시작된 때라 일제는 ‘국민 정신총동원’ 등 전쟁 준비를 위한 강제 징수와 전시동원 체제를 강요하던 시기였다. 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서울대목구 사제들은 노 신부의 주교 성성을 교황청에 청원하고 확고하게 조선대목구장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해 12월 20일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신부의 주교 성성식이 거행되었다.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주교가 탄생하였다.

1942년 2월 조선총독부는 서울대목구가 운영하던 용산 대신학교의 폐교를 일방적으로 알려왔다. 법적으로 ‘무인가 학교’이므로 폐교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 양성을 봉쇄하겠다는 의도였다. 다행히 덕원 베네딕도 수도원 내에 있던 덕원신학교는 1935년 설립 당시 총독부로부터 소정의 인가를 얻었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울대목구는 덕원수도원과 협의하여 대신학생들을 덕원신학교로 보내 수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치도 완전할 수 없었던 것이 소신학생들이 당시 5년제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대신학교로 진학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신학생 일부를 국외 유학 보내도록 했는데, 이마저도 전쟁에 동원되어야 했기 때문에 강제 징용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 말기에 김수환 신학생도 전쟁에 강제 징용되어 미군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동기동창 성직자들. 노기남 대주교, 왼쪽 방유룡, 오른쪽 윤형중 신부의 모습이다.

교회 건물 징발하고 외국인 선교사 추방

일제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교회 건물과 각종 시설을 강제로 징발하여 군수 시설로 사용했다. 1944년 1월에 평양의 관후리성당이 징발되어 헐린 뒤 일본군 고사포 기지로 사용되었고, 1945년 3월에 폐교된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일본군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그 밖에도 일제는 각 본당 및 공소의 성당종이나 철문·철책까지도 헌납하라고 강요하였다.

노기남 주교의 첫 시기가 더욱 어려웠던 것은 일제가 모든 외국인을 스파이로 의심해 국외로 추방하거나 구금했기 때문에 도움받을 선교사가 거의 없었던 점도 있었다. 1942년 6월에는 평양대목구의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전원이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고, 광주지목구와 춘천지목구의 골롬반회 선교사들 역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이라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남아 있던 골롬반회 회원들은 구금됐다. 본당 사목을 하고 있던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외부 출입이 제한됐고, 성당에서 미사 집전만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시련은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지속됐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