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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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나귀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는 예수님

참 빛 사랑 2024. 10. 4. 14:18
 
 
(작품 1) 예루살렘 입성, 템페라, 24,5 x 21,5cm, 16세기 노브고로드 지역, 레클링하우젠 이콘 미술관, 레클링하우젠, 독일


이콘 속 마중 나온 사람들은 아직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과 빛을 향해 다가오는 이방인

1. 기원(起源)

“보라, 주님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셨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이사 62,11)

이 축제는 동방 교회에서는 6세기부터 지냈으며 서방 교회에서는 7세기부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콘은 4세기 중반부터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길 바닥에 옷을 펴 깔았으며 종려 가지를 흔들어 기쁨을 나타내는 형태로 그려졌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축제는 승리한 왕의 개선을 환영하는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승리의 길로 들어오십니다. (작품 1)



2. 구성과 상황

집들과 나귀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 벳파게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 쪽 동네로 가거라. 매여 있는 암나귀와 그 곁의 어린 나귀를 곧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나에게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어라고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라고 대답하여라. 그러면 그것들을 곧 보내줄 것이다.”(마태 21,1-3)

복음서에서는 나귀와 새끼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느 나귀인지 기록하지 않았지만, 마르코·루카·요한 복음에서는 아무도 타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것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49-407)는 “나귀 주인들은 아마도 가난했을 터인데 어째서 아무 말 없이 내주었을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준비된 것처럼 나귀를 내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예언서에 이르듯이 주님께서 나귀 타고 오시는 것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지만, 그분이 다윗의 영광을 되찾아주실 분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분을 더욱 따르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그 표징을 일으키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이 서로 말합니다. “이제 다 글렀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소.”(요한 12,17-19 참)

이때 끌려 나온 나귀는 우리 자신이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설명합니다. 나귀는 길을 가다가 깔려 있는 풀을 먹으려 고개를 숙이기도 합니다. 나귀는 인간의 본능을 대변합니다. 즉 삶,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인간의 물욕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정신(영)과 물질, 즉 나귀를 타고 계신 그리스도와 인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교회가 그 의미를 채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시켜 나귀를 끌어내 당신 앞으로 오도록 만드셨습니다. 당신 앞에 오게 하심으로써 비로소 눈이 뜨여 주님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백성으로, 원래 깨끗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나아감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작품 2)

그분은 임금님으로 오시지만 결코 권력을 위한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실 영광의 임금님으로(요한 12,16) 오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의 열렬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함을(루카 19,44) 한탄하십니다. 세상은 진정한 빛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요한 1,10)

그러기에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2코린 4,6)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작품 2)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템페라, 제대에 들어가는 문 한 부분의 성인, 트레차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러시아
 
(작품 3) 예루살렘 입성, 템페라, 18세기, 리보르노 성당, 리보르노, 이탈리아

 

산과 사도들(작품 3)

실상 예루살렘 주위에 산은 있지만 그림에서처럼 높고 위엄을 갖추고 오르기 어려운 산은 없습니다. 그 산은 모든 것보다 높이 솟아있는 올리브 산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데 이 산은 메시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시온산으로, 하느님께서 계시는 산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산 위에 세워진 그 터전, 주님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성문들을 사랑하시니 하느님의 도성아 너를 두고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컬어지는구나.”(시편 87,1-3)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2-3)

그 산은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지금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따라서 받으실 고통도 산처럼 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콘에서 산은 도성을 둘러싸고 시편(125, 1-2)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시온산 같아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서 있으리라.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감싸고 계시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 산은 예루살렘보다 넓게 잡고 산기슭이 예루살렘을 둘러싸듯 내려가고 있으며 제자들도 주님 뒤에 모여 있습니다. 그분은 나귀에 걸터앉으시고 몸은 제자들을 향해 있는데, 그러면서 새로운 불림을 받아야 할 사람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이미 부름을 받은 새 민족, 즉 예수를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성에는 많은 사람이 환호하며 나와 있습니다. 그 성은 지상의 성이 아니라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문은 열려 있지만, 아직 어둠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제 그 성은 환해져야 합니다. 이제 빛이 들어가시면 그 어둠은 가실 것입니다. 문이 열려 있음은 우리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려 있지 않으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은총의 빛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로써 그분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의 문이 열림과 차츰 그분의 나라가 다가옴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장차 다가올 하느님 나라이며 하느님의 뜻이 그 나라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 참조)라고 하신 것처럼 쉴 곳을 마련하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쉬실 자리를 내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은 아직 어둠 속에 헤매는 백성과 빛을 향하여 오는 이방인, 즉 아직 예수님 앞으로 오지 못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계속>
 

김형부 마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