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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소탕에 2만여 명 희생된 필리핀, 교회는 무엇했나

참 빛 사랑 2024. 7. 1. 14:10
 
‘마약과의 전쟁’ 희생자 유족들이 2021년 6월 30일 마닐라에서 두테르테 대통령 반대 구호를 외치며 대통령궁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OSV

필리핀에서 ‘정의의 목소리’로 통하는 벽안의 선교사 쉐이 쿨렌(Shay Cullen, 81) 신부가 한 편의 글로 필리핀 교회에 묵직한 성찰 주제를 던졌다.

쿨렌 신부는 아시아 가톨릭 통신(UCAN)에 기고한 칼럼에서 “필리핀 국민, 특히 교회는 두테르테 정권 시절 무법천지 속에서 최소 3만 명 이상이 희생된 충격적 사실을 마주하고 진지한 양심 성찰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럼 제목은 ‘가장 어두운 시간에 빛을 비추며’이다. 글의 요지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재임 2016~2022년)이 주도한 초법적인 마약범죄 소탕작전에 교회가 침묵하고, 기껏해야 소극적 저항에 그친 데 대해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약 혐의자 초법적 살상과 인권 유린

두테르테는 2016년 대통령 당선 직후 사회에 만연한 마약범죄를 뿌리 뽑기 위해 ‘마약과의 전쟁’에 나섰다. 선거 공약 중 하나가 ‘취임 6개월 내 범죄 소탕과 부패 척결’이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경찰의 초법적 살상과 인권 유린이 공공연히 자행됐다는 것이다. 정부는 검거 불응자 사살 권한을 경찰에 부여하고, 심지어 사살 분대(death squads)를 암암리에 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쿨렌 신부는 “최근 그 살인적 폭력의 규모가 밝혀지고 있다. 3만 명 이상이라는 숫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통령 기록물보관소에 따르면 불과 17개월 동안 범죄 용의자 2만 322명이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려 사망했다”고 밝혔다.

쿨렌 신부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도덕적 가치의 정점에 올려놓아야 하는 가톨릭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당시 가톨릭교회와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의 대응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69년부터 55년째 필리핀에서 아동과 여성 보호, 인신매매 방지 등의 일을 하고 있는 성골롬외방선교회 선교사다. 가톨릭교회 주도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986년 ‘피플 파워’ 혁명의 현장에 있었다. 그는 “(마약과의 전쟁 중에는) 정의와 평화, 인간 생명 수호를 위해 교회가 주도한 시위 행렬은 없었다”며 이 침묵은 부끄러운 역사라고 말했다. 이어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선한 사람들이 계속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뒤늦게 발표된 사목 서한

그렇다고 교회가 ‘가장 어두운 시간’에 침묵만 지킨 것은 아니다.

필리핀 주교회의는 2019년 ‘선으로 악을 이기자’는 제하의 사목 서한을 통해 범죄 소탕 작전에 처음 이의를 제기했다. 주교들은 가장 먼저 자신들이 집단적 목소리를 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점에 대해 용서를 청했다. 이어 “거물급 밀수업자와 마약왕은 빠져나가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이 마약에 손대거나 소규모로 거래하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소식을 들으면서 이 전쟁의 방향성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단순히 심부름하다 체포된 빈곤층 아이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묻는 데 대해 법의 자비를 호소했다. 하지만 서한은 두테르테 정권은 물론 교회 지도부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다.

초법적 범죄 소탕 작전에 저항한 몇몇 성직자 가운데 구속주회 소속 아마도 피카르달 신부(5월 선종)는 그야말로 ‘어둠 속의 빛’이었다. 그는 살해 위협에 굴하지 않고 인권과 정의를 위해 행동했다.

두테르테 정부는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이 전쟁을 반인륜적 범죄로 규정하고 예비조사에 들어가자 사법 처리를 피하기 위해 2019년 ICC에서 전격 탈퇴했다.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현 대통령도 ICC 조사관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쿨렌 신부는 범죄 소탕 작전을 지지한 국민들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들은 범죄로부터 자유로운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정치인의 말을 어리석게도 맹목적으로 믿었다. 그래서 점점 더 큰 범죄가 저질러졌다. 우리에 갇힌 끔찍한 호랑이를 그들이 풀어줬다.”



김원철 선임기자 wckim@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