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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종합

특별 기고 / 우리가 에밀 카폰 신부를 알아야 하는 이유

참 빛 사랑 2021. 8. 5. 21:38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 6·25전쟁에 참전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박애를 실천한 에밀 카폰 신부가 지프차에 담요를 덮어 만든 임시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서울공대에 입학하여 발명가가 되고 싶어 했던 고(故) 정진석 추기경(1931~2021)은 6·25전쟁 동안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돌연 사제의 길로 진로를 바꾸었다. 정 추기경은 신학생 신분이었던 당시 우연한 기회에 「종군 신부 카폰」을 접했는데 하룻밤에 다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1956년 우리말로 번역해 신학생 신분이어서 다른 신부님의 이름으로 이 책을 냈다. 정 추기경은 언젠가 나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카폰 신부의 삶은 나의 청년 시절, 사제가 되기를 결심하는 데 도움이 됐어. 그는 나의 롤모델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다른 이를 도와주는 모습을 상상하면 온몸에 전율을 느꼈어.”

정 추기경의 카폰 신부님에 대한 사랑은 특별했다. 병상에서도 「종군 신부 카폰」 개정판을 위해 추천사를 구술로 나에게 쓰게 하셨고 수정 사항을 전달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도 카폰 신부의 생애를 많은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애썼다. 그 시기에는 정 추기경도 죽음을 기로에 서 있었던 위험한 시기였다. 정 추기경은 사제가 된 이후로도 줄곧 에밀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諡福諡聖)을 위해 기도했을 정도로 존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 병상의 심한 고통에서도 카폰 신부님의 유해 수습 소식을 듣고 크게 반기시며, 당신이 마지막 소임을 다 한 것처럼 기뻐하셨다.

2012년 교황청은 한국전쟁 중 포로수용소에서 숨을 거둔 에밀 카폰(1916∼1951) 신부의 시복시성을 결정하는 공식 조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카폰 신부에게 군인 최고 영예인 ‘명예 훈장 (Medal of Honor)’을 수여하며 “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가장 대단한 무기를 휘둘러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고 말했다. 앞서 1993년 교황청은 카폰 신부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했고, 현재도 그의 고향 캔자스주 위치토교구와 미국 군종교구에서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하며 기도하고 있다.

2021년에는 무명용사들을 모신 묘에서 신부님의 유해가 기적처럼 발견되어 드디어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고향을 떠나 먼 이국땅에서 숨진 지 70년 만의 귀향이었다.

‘6·25전쟁의 성인’ ‘전장의 그리스도’라고 불린 에밀 카폰 신부는 6·25전쟁에서 미군 군종 신부로 참전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다가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만 35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카폰 신부는 1916년 미국 캔자스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1940년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됐다. 6ㆍ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미 육군의 군종 사제로 전투가 한창이던 한국에 파견됐다. 이후 그의 소속 부대는 함경도 원산까지 진격했지만, 그해 11월 중공군에 포위된다. 이때 카폰 신부는 철수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채 통나무와 지푸라기로 참호를 만들어 부상병들을 대피시켰다. 그 후 몇 차례나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대로 남아 부상병을 돌봤다. 결국 그는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포로수용소는 인간성이 말살되는 비참한 곳이다. 카폰 신부는 자신의 편안함을 마다하고 부상자들과 포로들, 특히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사람들을 옆에서 간호하고 음식을 가져다주면서 사랑을 실천했다. 총상이 심하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들을 부축해서 혼자 가기도 벅찬 먼 길(100㎞ 이상)을 걸어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곡물을 훔쳐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는 한 사제이기 전에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위로자요, 보호자였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참전용사들은 “생존자의 최소 절반은 생명을 빚졌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 포로수용소에서도 적군인 중공군조차 카폰 신부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군인들의 고해성사를 들으며 사제의 의무를 다했다. 카폰 신부는 고통으로 힘들어 눈물을 흘리면서도 주변의 병사들에게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자신도 고난을 겪는 것이 기뻐서 운다고 위로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병사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을 잃지 않았던 카폰 신부는 포로들의 마음을 하나로 단결시켰고 죽음의 절망 속에서 희망에 불씨를 살렸다. 헌신적으로 동료들을 돌보던 카폰 신부는 오랜 수감 생활과 구타, 혹독한 추위와 영양실조 등으로 병에 걸려 1951년 5월 23일 당시 35세의 나이로 포로수용소에서 숨을 거뒀고, 이후 그의 시신은 어디에 묻혔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들이 카폰 신부의 업적과 그가 보인 헌신을 증언했고 이를 바탕으로 「카폰 신부의 이야기」(The story of Chaplain Kapaun)가 1954년에 미국에서 출간됐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적과 아군을 떠나 사람에 대한 사랑, 도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누구든지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인류애의 모범이 되었던 카폰 신부를 알고 존경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의 희생과 사랑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카폰 신부를 올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오늘날 이루어낸 눈부신 대한민국의 발전은 수십 년 전 이 땅에서 우리나라 청년들뿐 아니라 피를 흘린 카폰 신부와 같은 외국의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먼 이국땅에서 죽은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청년들 부모님의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보답하는 것은 무엇보다 역사를 바르게 오래 기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허영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