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아이들의 집’. 정신장애를 지닌 아이들부터 뇌 손상, 언어·보행 장애 등 중증 장애를 지닌 영유아를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모두의 관심과 따스한 손길 속에 이어져 온 이곳에 지난 30여 년간 매주 찾아온 ‘하얀 옷의 천사’가 있다. 인근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이화모(아기 예수의 데레사, 67) 본메디조아의원 원장이다.
그는 부산의료원 전문의로 일하던 1988년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의 집 주치의’로 물심양면 아이들의 건강을 책임져왔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올해 제17회 가톨릭사회복지대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대림 제2주일을 맞아 사회의 그늘진 곳에 온기를 전하는 데 앞장서 온 이 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그는 부산의료원 전문의로 일하던 1988년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의 집 주치의’로 물심양면 아이들의 건강을 책임져왔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올해 제17회 가톨릭사회복지대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대림 제2주일을 맞아 사회의 그늘진 곳에 온기를 전하는 데 앞장서 온 이 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장현민 기자 memo@cpbc.co.kr
아이들의 집을 찾아 어린이들을 진단하고 있는 이화모 원장. 이 원장은 1988년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의 집 직원·어린이들의 주치의로서 무료 방문 진료를 펼치는 등 36년 동안 나눔의 삶을 실천해 오고 있다.
부산 ‘아이들의 집’
중증 장애 영유아들 보호
36년간 한결같이 방문 치료
아이들과 인연
1988년 부산의료원에서 일하면서
의사라는 의무감으로 시작
도움 없이 병원 방문도 힘든 아이들
더 따뜻하게 돌보며, 건강 회복 도와
후원과 사랑 나눔
2006년부터는 촉탁의로 위촉
촉탁의 월급까지 후원금으로 도와
나눔이란
어머니의 봉사 등 가족들에게 배워
나눔은 멀리 있지 않아
관심 갖고 함께하려는 마음이 중요
“‘봉사’라는 말은 의대를 다닐 때 동아리 활동 말고는 거의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 제게봉사로, 더군다나 가톨릭교회가 상을 주신다니 한없이 영광스러울 뿐입니다.”
목소리에 겸손함이 느껴졌다. 지난 36년간 ‘아이들의 집’ 중증 장애 영유아들을 위한 방문 치료에 매진해온 것을 넘어, 북한 이탈 주민 의료 지원 및 결연 아동 후원에도 적극 참여하며 사회 그늘에 빛을 밝혀온 세월에 비하면 말이다. 그는 “상 받을 자격이 없다”며 연신 손사래 쳤다.
“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큰 부담감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더 헌신적으로 살아온 많은 분이 있는데 저 혼자 받는다는 게 민망하더군요. 더 열심히 활동하라고 격려하는 뜻이 담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화모 원장과 ‘아이들의 집’의 인연은 1988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그가 의사가 된 후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기 위해 부산의료원 전문의로 일하기 시작한 때다. 충남 내포 지방이 고향인 이 원장은 의사로서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다 공공의료기관인 부산의료원에서 첫 출발을 하게 됐다.
“당시 부산의료원은 의료 수가가 낮아 일반 병원에서는 진료 기피 대상인 의료보호 환자나 월남 난민 자녀 같은 사회 취약 계층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습니다. 젊디젊었던 의사로서의 패기와 이웃에 도움이 되자는 사명감으로 부산에서 일하겠다고 결심했죠.”
이 원장이 아이들의 집을 찾게 된 것도 ‘사명감’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집에 있는 영유아는 대부분 중증 장애아들로, 자신이 어떻게 아픈지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주변 도움 없이는 병원을 찾는 것조차 어려운 아이들도 많다. 일찍 병원만 찾았으면 금방 나을 질환을 내버려두다 큰 병으로 번진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 원장은 그래서 아이들과 더욱 정성껏 교류했고, 엄마가 돼줬다. 제때에 치료받지 못한 채 끙끙 앓던 아이들에게 더 따뜻하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그의 손길을 거친 아이들은 건강과 웃음을 되찾았다.
“간단한 감기도 제게 왔을 때엔 이미 폐렴으로 번져 큰일이 날 뻔하기도 했죠. 대체 어떻게 살길래 이런 상황인지 궁금해 아이들의 집을 찾아갔죠.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기보다 단지 의사라는 의무감으로 갔던 것 같아요.”
이 우연한 방문을 시작으로 이 원장은 매달 1~2회씩 아이들의 집을 찾아 진료봉사를 펼쳤다. 당시는 매일 병원으로 밀려드는 환자를 치료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을 찾기 어려운 아이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더 돕고 싶은 마음에 시간 날 때마다 아이들의 집을 찾았다. 게다가 아이들의 집 어린이들은 장애로 심각한 일상 질환이나 희귀 유전병을 지닌 경우가 많아 기본 의식주부터 생활·의료 재활까지 섬세한 돌봄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 원장의 발걸음은 아이들에게 한줄기 빛이 됐다. 2006년부터는 아예 보건·양육 시설을 주기적으로 찾아 진료하는 촉탁의로 위촉됐다. 방문·전화 진료를 포함해 매주 2회씩 아이들의 집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다. 여기에 이 원장은 촉탁의로 받는 월급을 고스란히 아이들의 집에 후원금으로 돌려주고 있다.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직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은 무엇인지 찾게 되더라고요. 간식을 사주거나, 컴퓨터·장난감·에어컨을 선물하고, 직원들의 예방접종도 해드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저희 병원 직원들도 아이들의 집 진료를 특별한 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가족이 된 거죠.”
아이들의 집을 찾아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화모 원장. 아이들의 집 제공
부산 아이들의 집에서 방문 진료를 하고 있는 이화모 원장. 이 원장은 지난 30여 년간 정기적으로 아이들의 집을 찾아 중증 장애가 있는 아동들을 진료하는 나눔의 삶을 실천해 왔다. 아이들의 집 제공
이 원장은 반평생 봉사에 매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가족’에서 찾았다. 어릴 때부터 신앙 속에서 봉사를 펼쳐온 가족의 모습을 보며 ‘나눔의 삶’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본당 레지오 마리애 활동으로 나눔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두 언니는 수도자가 되어 주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지요. 이들을 보며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제가 다니던 성당 인근에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보육시설이 있었습니다. 그곳 어린이들은 모두 저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본당 신앙생활을 함께했죠. 그런 또래들과 함께 성장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 받다 보니 이후 살면서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만났을 때 선뜻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원장은 나눔 실천을 주저하는 이들에게 “나눔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의 말도 남겼다. 일상생활, 나아가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게 이 원장의 생각이다.
“미사를 봉헌하며 헌금하는 것도 나눔의 삶이죠. 곁에 있는 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제공하는 것 역시 나눔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주변은 나눔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원장은 나눔의 삶을 더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나눔 교육’과 ‘진정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 원장은 “자신이 쓰고 남은 아무것이나 ‘적선’하는 게 아니라, “이웃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묻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동반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교육해 나가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나눔의 시작이 됩니다. 하지만 이를 넘어 여러 삶의 현장에서 실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가가 묻고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즉시 챙겨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중요하지요. 이들과 함께하는 게 당연한 사회라면 그들을 향한 우리 시선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모두가 이를 더욱 깊이 인식하고, 교육을 통해 미래 세대에 전할 수 있다면 사회가 한층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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