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차에 올라 조명 줄을 철거하는 작업자들. OSV·CNA
작업자들이 베들레헴 주님 탄생 대성당 앞 광장 상공에 실커튼처럼 드리워진 조명 줄을 철거하느라 분주하다. 고가 사다리차에 올라 줄을 거둬내는 작업자들 표정이 어둡다. 성탄절을 앞두고 1년 중 인파가 가장 붐비는 시기인데도 주변 성물 가게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다. 아예 셔터를 내린 상점도 많다.
미국 가톨릭 매체 CNA가 현지에서 전해온 베들레헴 풍경은 한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조명 철거는 베들레헴 행정 당국의 결정이다. 한나 하나이아 시장은 “다른 팔레스타인 도시와 마찬가지로 베들레헴도 슬퍼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성탄을 경축할 수 없어 행사 중단과 장식물 철거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우리는 평화의 땅에 평화가 임하도록 하느님께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은 ‘엎친 데 덮친 격’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8㎞ 거리에 있는 팔레스타인 구역이다. 이스라엘이 세워 놓은 분리 장벽을 통과해야만 접근할 수 있다. 주민 상당수가 식당과 성물점, 숙박시설 등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주민들은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 순례자들 발길이 뚝 끊겨 누구보다 힘든 시기를 보냈다. 감염병 확산세가 꺾여 다시 순례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는데,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발생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따르면 베들레헴은 경제의 60~70%가 순례자(관광객)에 의해 돌아간다. 관광유물부의 마제드 이샤크 국장은 “올해는 최대 성수기가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전쟁이 상황을 완전히 바꿔놨다”며 “이 때문에 베들레헴 근로자 1만 5000명 중 1만 2000명이 관광 업종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관광업 실직자의 90%는 그리스도인으로 추정한다”고 덧붙였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주님 탄생 대성당 앞 구유 광장을 비롯해 베들레헴 곳곳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된다. 하지만 올해는 트리와 조명 불빛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상점 진열대에 놓인 성물과 기념품에는 먼지만 잔뜩 쌓여 있다. 수공예품점 주인 로니 타바쉬씨는 “보통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인데도 순례자가 없다”며 “구유 광장은 우리 마음의 일부이기에 그냥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상점 주인은 “모든 게 불확실하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스도인 리나씨는 “우리는 슬픔과 고통, 아픔 속에서 성탄절을 맞이한다. 베들레헴은 너무 슬프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어 “그렇다고 성지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기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베들레헴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계 엄마와 아이들이 주님 탄생 대성당 부근 길가 건물의 외벽을 장식한 성가정(Holy Family) 모자이크 앞을 지나가고 있다. OSV·CNA
행사 대신 성탄 의미에 집중
대성당 내부는 적막이 흐른다. 수도자들의 기도 행렬 발걸음 소리가 더 크게 울린다. 대성당 중앙 제단 옆 계단으로 내려가면 복잡하게 얽힌 동굴이 나온다. 이 지하 동굴의 한 지점이 아기 예수가 태어난 거룩한 장소다. 생후 5개월도 안 된 딸을 안고 동굴에서 기도하고 나온 파레스씨는 “아내는 여전히 가자지구 남부 칸 유니스에 있다”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가자지구 출신인 그는 전쟁 때문에 베들레헴에 발이 묶였다. 사실상 베들레헴 주민 모두가 고립된 상태다.
베들레헴 라틴 본당의 라미 아사크리 신부는 “인류에게 대림 시기는 하느님 사랑과 평화에로의 초대에 응하는 시간”이라며 “우리는 옷이나 축제, 마켓으로 크리스마스를 드러내기보다 그 본질적 의미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앞서 피자발라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도 성명을 통해 “올해는 행사를 자제하고 대신 전쟁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더 강하게 연대하자”고 신자들에게 호소했다. 또 “성탄의 영적 의미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정의와 평화가 성지에 깃들길 기도하자”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림과 성탄 전례는 예년처럼 거행된다. 베들레헴에 있는 그리스도교 여러 종파는 성지 전통에 따라 대림 시기 시작 하루 전(2일)에 성지 수호자가 베들레헴 입성 장엄 예절을 거행했다. 주님 성탄 대축일 하루 전에는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가 같은 예절을 거행한다. 작은형제회 이스라엘 성지보호 관구 봉사자들은 주님 탄생 동굴에서 대축일 밤 미사를 봉헌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 이후 여러 종파가 함께 만들어 지켜온 관습이다. 다만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걸어온 길이라고 전해지는 ‘별의 거리(Star Street)’를 따라 걷는 행렬 규모는 대폭 축소된다.
김원철 선임기자 wckim@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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