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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보니파시오 성인이 신앙 불모지에 복음의 씨앗 뿌린 풀다 수도원

참 빛 사랑 2024. 11. 14. 17:44
 
풀다 주교좌 성당인 상트 살바토르 대성당(왼쪽)과 미카엘 성당(오른편 담장 위 성당). 바로크 건축가 요한 디첸호퍼가 1704년부터 8년에 걸쳐 지었으며, 본당 내부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을 참조했다. 1752년 풀다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됐다. 필자 제공

동서 오가는 교통 요지 풀다에 수도원 설립

이번 순례지는 중세 종교·문화의 중심지인 독일의 ‘풀다’입니다. 이곳은 1300여 년 전 풀다강 범람원에 설립된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시작된 곳으로, 지리적으로도 동서를 오가는 주요 길목이었습니다. 라인 지역과 슐레지엔을 잇는 ‘왕도(Via Reiga)’가 지나갔고, 북으로는 풀다강·베저강을 따라 카셀·민덴을 지나 북해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사도 성 보니파시오가 이곳에 수도원을 세운 이유도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719년 5월 그레고리오 2세 교황으로부터 게르만족의 복음화라는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그는 프리슬란트 선교의 실패 경험으로 아일랜드-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순회 선교보다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선교지에 세워 복음을 전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기도하고 일하며 정주 생활하는 수도원만이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방치된 도시, 심지어 황무지에서도 자생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739년 레겐스부르크·파사우·잘츠부르크 등 바이에른의 옛 로마 제국 도시에 설립된 교구들은 이런 선교 방식의 결실이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732년 선교 대주교로 서품된 뒤 신앙의 불모지에 수도원을 세우며 작센 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그 시작이 744년 3월 12일 풀다 수도원이었죠. 보니파시오는 제자 스투르미오를 초대 아빠스로 임명하여 풀다 수도원을 선교의 발판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풀다 대성당 성 보니파시오의 지하 무덤. 보니파시오 대주교가 순교하자 처음엔 시신을 마인츠 주교좌 성당에 안치했으나, 제자 스투르미오가 스승의 유언을 근거로 풀다 수도원으로 다시 옮겨왔다. 필자 제공

성 보니파시오, 프리슬랜드 선교 중 순교

보니파시오의 선교 열망은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사회를 가톨릭으로 통합·안정시키려는 프랑크 왕국의 새 주인인 카롤루스 왕조의 이해관계와 일치했습니다. 게다가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체계적인 교계제도가 성립되면 로마 말기처럼 행정의 공백을 메꿀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카롤루스 대제는 수도원을 물심양면으로 전폭 지원했습니다. 교황들도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독립을 보장하며 선교를 장려했지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수도원은 이민족의 복음화, 지역 안정과 발전을 이루는 영적 야전병원 역할을 이어 나갔습니다.

754~755년 보니파시오가 프리슬랜드 선교 중 순교합니다. 풀다에 순교자의 시신을 모시면서 순례가 시작됐고, 귀족들의 통 큰 기부로 9세기 풀다 수도원은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수도원·수녀원 수십 개가 더 세워졌고, 수도자 수만 600명이 넘었습니다. 그 결과 803년 민덴의 초대 주교를 배출했고, 11세기 초까지 마인츠 대주교 중 7명이 수도원에서 나왔습니다.

819년 새롭게 완공된 라트가르 수도원 성당은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큰 교회 건축물이었습니다. 이 시기 수도원 필사실의 성과도 돋보입니다. 라바누스 아빠스(822~844년 재임)는 고전 문헌뿐 아니라 복음서·기도서·성사집 등을 필사하고 제작하도록 했는데, 당시 도서관에 2000여 편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옛 고지 독일어로 된 오트프리트의 ‘복음서’ ‘힐데브란트의 노래’ ‘헤일리안트’ 등은 독일어의 기초가 됐습니다. 특히 11세기의 ‘성사집’ ‘코덱스 비데킨데우스’는 오토 왕조 시대 서적 장식 기술의 백미입니다.
괴팅겐의 풀다 성사집(11세기). 미사 전례와 성사 전례에서 사용하는 기도문 모음집. 11세기 브레멘-함부르크 교구용으로 풀다 수도원이 제작했다. 필자 제공

1000년 쌓아온 영예 무너지고 영지 국유화

968년부터 풀다 수도원장은 독일의 모든 베네딕도회의 총재 아빠스가 됩니다.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수도원 주변에 모여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1170년에는 성직자가 영주인 제후 아빠스가 되는데, 자기 성직 제후령에서만 묵어도 로마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유럽 곳곳에 영지가 방대했습니다.

풀다역에서 나와 잠시 걸으면 넓은 공원과 옛 제후 아빠스의 궁이 보입니다. 풀다 대성당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풀다 수도원장은 11세기 제후 아빠스가 되면서 세속 권력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13세기부터 세속 영주처럼 수도원 밖 궁에서 살았습니다. 지금 모습은 18세기 초 아달베르트 제후 아빠스가 새로 지은 궁인데, 현재 관공서와 박물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 너머 보이는 풀다 대성당은 그때 지하 무덤과 토대만 살리고 바로크 양식으로 완전히 새로 지은 것입니다. 교회 안팎으로 제후 아빠스의 힘을 과시한 셈입니다. 1752년 수도원이 교구로 승격되면서 제후 아빠스는 주교품을 받습니다. 제국 수도원으로 성직 제후령에서 재치권을 행사했는데, 이제 교회 지역까지 관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1000년을 쌓아온 영예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19세기 초 성직 제후령이 폐지되고 국유화되면서 풀다 수도원은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중세 문화의 요람이었던 도서관은 이미 30년 전쟁 중에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보니파시오 성인의 무덤만 오늘날까지 온전히 남아 성인과 초기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선교 열정을 나약한 인간의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성 보니파시오 축일 앞두고 도보 순례

매년 10만 명이 넘는 순례자가 찾아옵니다. 특히 성 보니파시오 축일(6월 5일)을 앞두고 5월 말부터 풀다교구민들은 소속 본당에서 대성당까지 도보로 순례합니다. 축일 순교자 현양 미사에는 수천 명이 참여하는데, 전통적으로 다른 교구의 주교가 주례합니다. 1300년 전 불모의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었다는 상징일 겁니다. 1980년 11월 폴란드 출신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성인 무덤 앞에서 한동안 기도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철의 장막이 걷혔습니다. 이제 삶에서 어떤 장막을 걷어야 할지, 성인의 무덤 앞에서 선교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순례 팁>

※프랑크푸르트 등 주변 대도시에서 차로 1시간, 독일 고속철 ICE로 50분 이내다. 북쪽 메르헨가도에서 내려온다면 프리츨라를 들러도 좋다.


※성 살바토르 대성당과 성 보니파시오 지하 무덤, 미카엘 성당(11~3월에는 오후만 개방), 멋진 풍광의 프라우엔베르크 프란치스코회 수도원(레스토랑, 손님 숙소에서 1박 가능)


※대성당에서는 주일 10시와 18시, 평일에는 7시 미사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