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시미로 성인은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인 카시미르 4세와 독일 황제 알베르트 2세의 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3명의 형제 가운데 셋째인 가시미로는 폴란드 크라쿠프 바벨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과 정결의 소중함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여섯 살부터는 요한 들루고즈 신부에게 학문과 종교에 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성스럽고 엄격하면서도 사랑이 충만한 생활에 대한 희망을 키워나갔습니다.
가시미로는 부왕과 헝가리 귀족들로부터 헝가리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국왕을 축출하는 작전에서 군대를 인솔하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그 계획이 부당하다고 여겨 거부했습니다. 그로 인해 작은 성에 감금되었지만,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가시미로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기도와 수덕생활에 전념할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또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딸과 결혼시키려는 부왕의 계획도 끝까지 거부하고 동정을 지켰습니다. 성모 신심이 뛰어났던 그는 직접 지은 ‘하루도 빠짐없이 성모를 찬송하세’라는 찬가를 불렀는데, 오늘날까지도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어 불리고 있습니다.
가시미로는 1481~1483년 부왕이 리투아니아에 국사로 가 있는 동안 그를 대신해 폴란드를 통치했습니다. 당대 전기에 따르면, 가시미로는 ‘가난한 자의 옹호자’로 불릴 정도로 어려운 백성들을 잘 돌봤고, 권좌에 앉아 다스리기보다 봉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1484년 26세 나이로 대공의 직위를 겸하고 있던 리투아니아 방문 중 3월 4일 폐결핵으로 선종했습니다. 가시미로의 유해는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인 빌나의 주교좌 성당에 안치됐습니다. 생전에도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던 가시미로는 사후에 더 큰 공경을 받았고, 그의 무덤에서도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시미로는 1521년 레오 10세 교황에 의해 시성 여부가 확정됐는데, 그해 12월 교황이 전염병으로 갑작스럽게 선종하고 1527년에 발생한 로마 약탈 사건으로 교황청의 많은 중요 문서가 소실되면서 그의 시성 결정 여부를 문서로 확인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공경은 계속되었고, 이미 1583년에 출판된 「로마 순교록」에 그의 이름이 포함된 상황이었습니다. 1602년 3월 4일 클레멘스 8세 교황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가시미로의 축일을 기념하는 것을 승인, 그가 이미 레오 10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음을 확인해줬습니다. 1604년 선종 120년 만에 가시미로의 관을 열었을 때, 유해는 온전히 보존돼 있었고 그가 작성한 성모 찬가 악보도 글씨가 선명한 채로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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