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는 ‘인구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후 저출생 대책에 관한 기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 기사는 정부의 대책이 위기만 강조할 뿐,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인구전략기획부’를 신설하고 재원 마련을 위해 ‘인구위기특별회계’를 도입하고, 기존 저출생 관련 제도(일-가정 양립, 양육, 주거)의 기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상향하겠다고 했다. 특히, 저출생의 핵심과제를 ‘일-가정 양립’이라고 보고 이와 관련된 기존 제도를 상향 조정하겠다고 했다. 이는 사실 담당 부처의 신설과 회계 도입을 빼면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의 일-가정 양립 정책은 이미 오래전 선진국의 정책들을 도입해 형식상 정착되어 있지만, 실효성이 매우 낮다. 게다가 일-가정 양립 제도에 수요자들이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왜냐면 여성 노동자의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어 고용보험 가입자가 적고, 기업 환경 또한 성평등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일-가정 양립 제도들은 특정 직업군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등 계층적 편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제도의 수준을 아무리 상향시켜 보았자 기존 이용자들의 수급 수준만 높일 뿐이다. 이런 접근 방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의 결혼 의지를 높이거나, 결혼했으나 아이를 낳지 않고 있는 청년들의 출산을 유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위기’로 포장된 정부의 저출생 정책은 선진국 수준의 제도만 도입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 제도가 뿌리내리는 토양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귤을 회수 이남에 심으면 귤이 되지만 회수 이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귤과 탱자는 잎 모양은 비슷하나 맛과 향 차이가 크다. 왜 그런가? 물과 토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출생과 관련된 선진국의 물과 토양은 우리나라와 매우 다르다.
우선,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성차별이 우리보다 현저히 낮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낳아 키워도 동등한 처우를 받도록 제도화되어 있어 결혼 없는 출산율이 높다. 어떤 논평가는 동거조차 알리기 힘든 우리나라에서 결혼 없는 동거를 제도화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물론 관습의 힘은 엄청나서 제도가 관습을 단숨에 억제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과 같은 초초초 저출생 상황에서 이것저것 가릴 수는 없다. 혹시 아는가, 제도가 관습을 서서히 약화시켜 물꼬를 트게 할지 말이다.
또 선진국은 우리나라처럼 자녀 한 명을 키우기 위해 사교육에 재산의 상당 부분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도 전혀 아니다. 이처럼 선진국의 저출생 정책 토양과 우리나라의 토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저출생 정책 그 자체보다 저출생 정책의 ‘토양’을 바꾸는 데는 긴 여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이것 없이는 백약이 무효라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결혼·출산·삶에 대한 청년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어떤가?
김인숙(모니카,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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