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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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이야기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9) 스테파노의 설교(7,1-53)<2>.

참 빛 사랑 2019. 5. 31. 23:27


성령을 거역하는 최고의회의 완고함 질타하다




최고의회 사람들 앞에서 한 스테파노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따랐는지, 또 하느님께서 어떻게 함께하셨는지를 이야기합니다.(7,1-38)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과 성전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면서 최고의회 사람들을 직접 겨냥합니다.(7,39-53) 이 둘째 부분을 중심으로 스테파노 설교를 계속 살펴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7,39-43)


하느님께서 지도자요 해방자이자 예언자로 보내주신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스테파노는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우리 조상” 곧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7,39)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모세의 형 아론에게 자기들을 이끌어줄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송아지를 만들어 희생제물을 바치며 즐거워하지요.(7,40-41; 탈출 32,1-6)  

그들이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시고 그들이 하늘의 군대를 섬기게 내버려 두셨다”고 스테파노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느님을 섬기기보다는 “몰록의 천막과 너희 래판 신의 별을, 곧 너희가 경배하려고 스스로 만들어 낸 상들을 떠메고 다녔다”고 아모스 예언서를 원용해 지적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유배 생활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7,42-43; 아모 5,25-27) 몰록은 가나안과 페니키아 지방에서 섬기던 태양신을 가리키고 래판은 별신의 하나입니다. 하늘의 군대는 하늘에 있는 태양, 별, 달 같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통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며 하느님을 배신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서의 말은 또한 바로 이어오는 하느님 거처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의 거처(7,44-50)

스테파노는 이제 하느님의 성전으로 이야기 방향을 돌립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모세가 만든 ‘증언 천막’ 곧 증언 궤를 모셔두는 ‘만남의 천막’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다윗 시대까지 증언 천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증언 궤가 있는 증언 천막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증언 천막 대신에 하느님의 거처를 새로 만들고자 했지만, 하느님을 위해 집을 지은 왕은 다윗이 아니라 그 아들 솔로몬이었습니다.(7.44-47)

그런데 스테파노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는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7,48)고 단언합니다. 그러고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 자기 말을 정당화합니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주겠다는 것이냐?─주님께서 말씀하신다─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7,49-50; 이사 66,1-2)

스테파노의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스테파노의 생각이 부정적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실제로 당시 그리스계 유다인들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하지 않더라도 율법을 잘 지키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테파노 주변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정통 유다인들에 비해 성전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춰 보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고의회에서 스테파노를 고발한 거짓 증인들이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6,14-15) 하고 말한 것도 성전을 낮춰보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거나 스테파노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보다는 “여기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있다”(마태 12,6)고 하신 예수님이 더욱 크고 중요함이 분명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자들(7,51-53)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고 주장한 스테파노는 이제 최고의회 의원들을 향해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하며 대놓고 질타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테파노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합니다.(7,51)

스테파노는 최고의회 의원들이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하는 이유를 적시합니다. “그들(조상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7,52)  최고의회 의원들이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했지만, 그 어조는 더욱 강했습니다. 조상들은 의로우신 분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예언자들을 죽였지만, 최고의회 의원들은 의로우신 분 자체를 죽였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최고의회 의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다음 호에 계속 살펴봅니다.

생각해봅시다

조상들의 불충과 하느님의 처소, 그리고 최고의회 의원들에 대한 맹렬한 질타로 이루어진 스테파노 설교의 두 번째 부분은 우리에게도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풀려났지만, 광야에서 마음은 이집트의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피하고 홍해 바다를 건너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의 여정에 해당합니다.

대탈출로 새 삶을 출발했지만, 광야에서 시련에 부닥치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만 옛 생활을 그리워하고 맙니다. 하느님은 눈앞에 보이지 않고 현실 삶은 고달프고, 그러니 뭔가 의지할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우리는 어떤지요? 세례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새 출발을 했지만 삶은 여전히 팍팍합니다. 아니, 하느님을 몰랐을 때보다 더욱 힘든 것 같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법을 따르며 살기보다는 지난날 살았던 방식대로 사는 것이 훨씬 편했던 것 같고, 그래서 자꾸만 그 길을 돌아봅니다.

이렇게 뒤돌아보는 일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하느님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좇으려 하고 성령을 거역합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과 귀에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성령을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분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면 들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