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형찬(라이문도, 서울예대 예술창작기초학부 교수
한 교육기업이 전국 초·중·고 교사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그 결과 90%에 가까운 교사들이 “과거에 비해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고 답했다. ‘어떤 점이 변했느냐?’는 질문에 50%가 넘는 교사가 “학생보다는 아무 탈 없이 1년을 보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답했다. 그리고 30%에 가까운 교사는 “학생이 잘못해도 혼내거나 벌을 주지 않게 됐다”고 답했다. 또한 “학생이 문제를 일으켜도 학부모와 상담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나왔다. 어떤 초등학교 교사는 “학부모의 민원이 두려워 몸을 사리고 기계처럼 가르치기만 한다”고 고백했고, 또 다른 교사는 스스로를 ‘생계형 교사’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이 나라 교육은 회복하기 어려운 단계에 들어섰다. 누가 이 나라 교육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을까? 가르치는 교사일까? 배우는 학생일까? 아니면 학부모일까? 사회일까? 그 누구를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가해자이고 모두가 피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힌 것이다. 어쨌든 교육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은 교사이므로 교사가 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어느 교육학자의 말대로 ‘교사는 상품을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육체적 노동자가 아니다. 학생들에게 정신적 감화를 주는 예술적 근로자이며, 더 나아가 높은 이론적 배경과 오랜 기간의 학문적 수련을 필요로 하는 전문직업인’이다. 교사가 학생들을 기계처럼 가르치고 생계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런 사람은 교직에서 어서 내려와야 한다. 교직은 거룩한 성직(聖職)이며 동시에 정성을 다해 가르쳐야 하는 성직(誠職)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본질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바로 줄탁동시(啄同時)이다. 병아리가 딱딱한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해 끊임없이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병아리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함께 쪼아주는 것을 ‘탁’이라 한다. 교육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려고 애쓰는 학생을 교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힘껏 도와주는 일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학생들은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교사는 이를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이 알을 깨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교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학생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교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학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는 스승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교육은 학생의 머릿속에 정보를 채워주는 일이 아니다. 지식과 지혜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켜 주는 일이 교육이다. 교사와 학생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배워간다. 양쪽이 모두 학생이기 때문이다.” 이는 간디의 정신을 이어받은 비노바 바브가 한 말이다. 줄탁동시의 가르침과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의미를 제대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이 나라 교사들은 반드시 비노바 바브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 6, 9)
'사회사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동=힘듦’, 아르바이트는 ‘시급’이 중요… 청년 노동사목 활성화 시급.. (0) | 2018.06.28 |
---|---|
[사도직 현장에서]평화는 무력으로 얻을 수 없다. (0) | 2018.06.25 |
환경의 날(5일) 특집 - 생태적 삶을 사는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0) | 2018.05.31 |
내 집 없는 서러움… 헌법에 주거권 명시해야. (0) | 2018.05.08 |
“늘푸른 상록수 같은 신앙생활 하세요”. (0) | 2018.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