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두 가지 꿈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꿈이 있다. 근로자들이 최고로 대우받는 회사를 만드는 것과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평화의 작은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회사를 시작한 지 올해로 만 40년이지만 아직 그 꿈을 한 번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고 않고 그 꿈을 키운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로마 5,5)는 것을 깊이 확신하기 때문이다. 친환경 플라스틱 용기 및 반도체 부품 용기 생산업체인 (주) 디케이씨(D.K.C.) 맹충조(타대오, 73) 회장 이야기다.
맹 회장은 전북 임실의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어렵지 않게 살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발발한 6ㆍ25전쟁은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다. 1남 3녀의 맏이인 그는 가장이 돼 가계를 꾸려야 했다. 산에서 나무를 해 살림에 보탰고, 전주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는 아이스케키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그동안 모아두었던 1500원을 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단팥죽 한 그릇에 3원 하던 시절이었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1967년 신당동성당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 가입해 활동했다.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 등으로 가톨릭 교회가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J.O.C. 활동은 청년 맹충조에게 열악한 노동 현실을 직시하면서 노동자 인권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전태일씨의 분신 사건은 같은 노동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 생활을 청산하려면 사업을 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됐습니다.”
청년 맹충조의 결심은 5년 후에 첫 결실을 보았다. 1975년 플라스틱 용기를 생산하는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회사명을 김대건 신부님의 이름을 따서 ‘대건’이라고 지었지요.” 디케이씨(D.K.C.)라는 이름이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근로자들이 최고 대우를 받는 회사가 목표였다.
맹 회장은 플라스틱 용기 생산 전문 업체로 자리잡아갈 무렵 플라스틱이 인체에 해롭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맹 회장은 제품 소재를 인체에 무해한 합성수지인 페트(PET) 소재로 바꾸었다.
“소재를 PET로 바꾸면서 주문이 급속하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을 하루 24시간 계속 가동해야 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공장에 불이 나 장비를 거의 다 잃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3대째 구교우인 맹회장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인 하느님이 계셨다. 1991년 경기 북부 연천(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으로 공장 부지를 이전해 재기했다. 회사는 다시 활기를 띠었고, 한때 시장 점유율이 90% 가까이 이를 정도로 디케이씨 제품은 인기를 얻었다.
회사가 번창하면서 반도체 칩을 담는 용기 제작하는 쪽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중국 심양에 관련 제품 생산을 위한 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맹 회장은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PET보다 훨씬 친환경적인 생분해성 수지 제품 개발에 나선 것이다.
“사용 6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분해되는 생분해성 용기 제품 생산이야말로 정말 하느님 뜻에 맞는 사업이라고 여겼습니다.”
생분해성 친환경 제품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창조 질서 보전에도 함께하겠다는 맹 회장의 의욕적인 도전은 그러나 10년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생분해성 제품은 PET 제품에 비해 세 배나 비쌌습니다. 가격대가 너무 높아 시장성이 없었던 거지요.”
2000년대에 들어와 개성에 공업지구가 들어서면서 맹 회장은 심양에 있는 공장을 개성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심양을 자주 오가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2004년 제주도에서 북한에 귤 보내기 운동을 했을 때 함께 참여하면서 북한에도 다녀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개성 공단이 열리면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2007년 마침내 개성 공단에 입주했고, 6년 만인 2013년 1월에는 직원 860명의 개성 공장도 흑자로 돌아섰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해 4월 개성 공단이 잠정 폐쇄되면서 회사에는 다시 먹구름이 끼이기 시작했다.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으면서 주 납품처였던 삼성과의 거래가 끊겼다. 회사는 다시 적자 상태로 돌아섰다. 하지만 맹 회장은 개성 공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북한 근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도 우리와 한민족임을 확인했습니다. 엄한 통제 사회에서 사는 북한 주민들이 서서히 변화되고 우리도 그들을 보는 눈과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 한 민족으로서 동질성을 회복한다면 그로써 참된 평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가 자리 잡게 되리라고 보았습니다. 개성 공장과 공단은 제게 그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개성 공장을 통해서 맹 회장은 자신이 어느새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작은 일꾼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 그 일을 위해 하느님께서 자신을 개성으로 불러주신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맹 회장은 한 달에 보름 이상 개성에서 지낼 정도로 정성을 들였고, 해외 판로 개척에도 힘을 쏟았다. 북한 근로자들은 회사가 적자 상태임을 알면서도 계속 나왔다. 맹 회장은 그들이 고마워서라도 더욱 힘을 냈다.
드디어 올 1월 1일 개성 공장의 가동률이 50%가 됐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은 첩첩산중이다. 개성공장이 정상궤도에 오르고, 꺼질 것 같은 불씨인 개성 공단이 남북간 화해와 평화의 횃불로 활활 타오르는 그 날까지 맹 회장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평화의 하느님 친히 그 희망의 보증이 돼 주신다고 맹 회장은 굳게 믿는다.
글·사진=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서울가톨릭경제인회는 ‘나의 신앙, 나의 기업’에 소개할 교우 기업인들을 추천받습니다. 아울러 경제인회 활동에 함께할 교우 기업인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 02-755-7060
'신앙인의기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신앙, 나의 기업](6) 김인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서광하이테크 대표이사 (0) | 2016.09.26 |
---|---|
[나의 신앙 나의 기업](5) 최상준 다니엘 (주)남화토건 대표이사 (0) | 2016.09.26 |
[나의 신앙 나의 기업](4) 김강희 비오 (주)가치 대표이사 (0) | 2016.09.26 |
[나의 신앙 나의 기업](3) 이순금 모니카 (주)아이비스 대표이사 (0) | 2016.09.14 |
[나의 신앙, 나의 기업](1)류덕희 모세, 경동제약 회장 (0) | 2016.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