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업계의 모세’, 진취적 경영과 사회적 나눔 이끌어
평화신문은 이번 호부터 새 연재 기획 ‘나의 신앙, 나의 기업’을 시작합니다. 가톨릭 경제인회(회장 유영희)와 함께하는 이 시리즈는 기업을 경영하는 가톨릭 신자를 찾아 그들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이를 통해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기업을 가꾸며 복음 정신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신자 기업인들을 격려하고 나아가 경제 사회의 복음화를 도모하고자 합니다.
경동제약 류덕희(모세) 회장
대학 시절,‘화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학문’이라는 교수 말에 창조적인 일을 하리라 마음 먹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청년은 제약회사에 몸을 담았다가 몇 년 후인 1975년 9월 회사를 창업했다. 유일상사라는 상호의 이 회사는 이듬해 5월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올해 창업 40주년을 맞는 경동제약 류덕희(모세, 78) 회장 이야기다.
경동제약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동안 시중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약보다는 병원에서 사용하는 전문 의약품을 집중적으로 만들어 온 까닭이다.
“회사를 창업하던 1970년대 당시에는 많은 제약회사가 외국 약을 수입해서 판매하고 있었는데, 저는 완성된 약을 비싸게 사기보다는 원료를 수입해서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원료 수입을 통한 제약으로 눈을 돌린 류 회장은 약품 원료를 직접 개발하는 데도 주력했다. 그래서 수익이 나면 연구 인력을 육성하고 공장과 연구소를 짓는 데 투자했다.
“IMF 금융위기 직전에 회사에는 42억의 빚이 있었습니다. 약품 원료를 만드는 공장을 짓느라고 생긴 빚이었습니다. 그런데 IMF 사태가 터진 거지요. 그게 오히려 복이 됐습니다. 수입 약값이나 수입 원료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는데, 우리는 원료를 생산할 수 있으니 싼 가격에 약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84억을 벌어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경동제약은 40주년이 되는 지금 직원 480여 명, 연 매출 1300억 원에 해외 수출 2000만 달러를 올리는 탄탄한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관련 업계의 국내 50여 개 상장사 가운데 영업 이익률이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개척 정신과 도전 의식이 있어야 한다. 남들이 약품을 수입할 때 원료를 수입하고, 원료를 수입할 때 원료를 자체 개발하는 개척 정신과 도전 의식, 이것은 류덕희 회장이 오늘의 경동제약을 이룬 밑거름이 됐다.
어린 시절, 춘궁기가 되면 할머니는 손자에게 마을에서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을 보고 오라고 했고 그 집에 곡식을 갖다 주곤했다.
1980년대 초반, 회사 앞으로 한 복지시설에서 보낸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사정이 어려우니 영양제 등 필요한 몇 가지 약으로 도와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돈으로 누구를 도와줄 형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돈이 아닌 의약품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이어서 간부 몇 사람과 함께 영양제, 소화제, 해열ㆍ진통제 등을 가지고 복지시설을 방문했다. 시설 원장은 “여러 회사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렇게 작은 회사에서 찾아와줬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류덕희 회장이 전하는 30여 년 전의 일화다. 류 회장은 “그 일을 계기로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꼭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돕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임을 깨달았다”고 회고한다.
“회사가 안정을 찾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학교나 기관 등을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수익의 10%를 나눔에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실제로 류 회장이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모교인 성균관대에 기부한 금액은 70억 원에 이른다. 가톨릭대학교와 생명연구소 등 교회 관련 학교나 기관에도 모두 10억 원을 기부했다.
“2001년에는 제 개인 보유 주식의 15%를 내서 장학재단을 설립했습니다. 가족회의를 열어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 기쁘게 찬성하더군요. 송천장학재단이 그렇게 해서 시작됐습니다.” 이 재단을 통해 학생들의 장학금과 기관의 학술 연구비 등으로 지원한 돈이 40억 원에 이른다.
경동제약은 1980년대 초반 토요 휴무제를 시행했다. “당시는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 토요 격주 휴무제가 없었지요. 저는 한 달에 두 번 토요 휴무제를 시행했습니다. 한 번은 가정을 위해, 한 번은 건강을 위해 쉬도록 했지요. 몸이 건강하고 가정이 행복해야 회사 일도 잘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뿐 아니다. 경동제약은 1997년에 사내 근로복지기금을 설립, 직원 자녀들의 학자금(대학까지)은 물론, 문화 활동비, 생활안정기금, 경조비 등을 지원해오고 있다. 또 2000년대에 들어서는 세 차례나 전 임직원이 해외 연수(일본과 중국)를 다녀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기업의 목적은 이익 창출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익의 공정한 분배와 사회 환원도 중요합니다.”
부족함 많지만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유교 집안 출신인 류 회장은 학창 시절에 개신교회에 가보았고 여러 번 권유도 받았으나 내키지 않았다. 결혼 후 아무래도 신앙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아내와 함께 용산성당을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1980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지도자 모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아 세례명을 모세로 택했다.
신앙을 가진 지 몇 년 안 되어 류 회장은 두 차례 큰 체험을 했다. 문상을 다녀오다가 빙판에 차가 미끄러지면서 수십 미터를 날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차가 날아갈 때 ‘하느님 다른 사람은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를 바쳤는데, 그 기도 덕분인지 류 회장만 어깨 쪽을 다쳤을 뿐 다른 사람들은 거의 다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인천 공장에서 불이 났다. “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가면서 제발 약만큼은 타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선지 약을 쌓아놓은 창고는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다. 결국 다시 공장을 가동할 수 있었지요.”
1985년 용산본당 총회장에 임명돼 숙원인 성당 신축을 비롯한 크고 작은 일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류 회장은 구역장 봉사에 이어 다시 한 번 총회장으로 봉사했다. 또 이 시기에 한국평협 사무총장과 회장으로 8년 동안 봉사했다. 한국평협 회장 재임 시에는 특히 평신도 신원 확립과 평신도 사도직 활성화에 힘을 쏟았고, 2000년 대희년 맞이 평신도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류덕희 회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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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경기도 화성(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태생으로, 성균관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경동제약을 설립했다. 서울 용산본당 총회장, 한국평협 회장, 제약협회 이사장,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현재 성균관대 총동창회장, 운석장면총리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가톨릭레드리본 대표이사 등을 맡아 회사 일 외에도 교회 안팎에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주요 수훈으로는 ▲가톨릭경제인(실업인)대상(2000) ▲금탑산업훈장(2003) ▲성 십자가 훈장(2012) ▲2000만불 수출의 탑(2014) 수상 등이 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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