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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국외)

[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20. 카이사리아

참 빛 사랑 2015. 6. 13. 10:44

 

 

[사진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성지기행] 20. 카이사리아


▲ 카이사리아는 '이방인 선교의 요람' 지역이다. 사진은 헤로데 임금이 조성한 카이사리아 전차 경기장 유적.



주님께서 예리코 앞 요르단 강가 모압 벌판에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의 경계를 정해주셨다. 그 경계는 동쪽으로 킨네렛 호수, 서쪽으로 큰 바다와 해변, 남쪽으로 소금 바다, 북쪽으로 호르 산 하차르 에난까지 였다(민수 34,1-12).

 유다인들이 히브리말로 '하얌 하가돌'이라 부른 가나안 땅의 서쪽 경계 '큰 바다', 해가 지는 방향이어서 '서쪽 바다'(신명 11,24)라고도 부른 게 바로 '지중해'다. 이집트를 탈출하던 유다인들은 이 지역 남쪽 연안에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거주해 '필리스티아 바다'(탈출 23,31)라고 불렀다.

 헤로데 임금은 이 서쪽 바닷가에 기원전 22년부터 13년간 대규모 공사를 펼쳤다. 그는 거센 파도가 치는 이 해안가에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콘크리트 수중공법을 이용해 방파제를 세웠다. 무게 20t이 넘는 콘크리트를 덩어리들을 가라앉혀 만든 방파제 길이는 남쪽으로 500m, 북쪽으로 200m나 됐다. 또 샘이 없는 이곳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가르멜 산 수니 샘까지 20여㎞의 수로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상궁정과 원형극장, 전차경기장 등을 갖춘 화려하고도 웅장한 로마식 항구 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기원전 9년에 완공한 이 도시를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게 바치며 이름을 '카이사리아'라고 했다. 이 도시 유적은 오늘날 이스라엘 텔아비브와 하이파 중간 지역에 있다.

▲ 헤로데 수상 궁전터로 유다 총독 관저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 수상 궁전은 민물을 끌어들인 수영장도 갖추고 있었다.


  ▨유다 총독 관저가 된 헤로데 수상 궁전
 황제의 도시 카이사리아는 곧바로 로마 제국의 유다 총독부 자리가 됐다. 바다 위에 지어진 헤로데의 수상 궁전은 본시오 빌라도가 차지했다. 이 수상 궁전은 민물을 끌어들인 수영장도 갖추고 있었다. 빌라도는 이곳에서 1년에 3차례 예루살렘을 순시했다. 유다인들이 의무적으로 성전에 모이는 3대 명절 때에 일어날 수도 있는 폭동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 헤로데 수상궁전 유다 총독 관저 터에서 1961년에 본시오 빌라도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이 발견됐다. 이 비문은 빌라도의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금석문이다.

 

▲ 카이사리아 야외 원형극장 유적으로 사도행전 12장의 배경이 된 장소다.


 ▨야외 원형극장

 로마를 너무나도 동경한 헤로데 임금은 이 도시에 야외 원형극장을 지었다. 3500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은 모두 아름다운 지중해 석양을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돼 있고, 어디에 앉아있던 노래와 연설을 똑같은 음향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 원형극장에선 지금도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유다 왕으로 책봉한 헤로데의 손자 헤로데 율리우스 아그리파스 왕은 이 극장에서 연설하다 돌연사했다(사도 12장 참조). 그가 죽자 이스라엘 전역은 로마 직속령이 됐다.

 
 ▨전차 경기장

 카이사리아 도심에는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히포드롬', 즉 전차 경기장이 있었다. 이 히포드롬은 제1차 유다항쟁(66~70년)때 검투장으로 바뀌었다. 반란을 진압한 로마 티투스 장군은 포로들을 이 경기장으로 끌고 와 검투 시합을 벌여 2500여 명을 살해했다. 바르 코흐바가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대항해 제2차 유다항쟁(132~135년)을 일으켰을 때도 율리우스 세베루스 장군이 아키바 랍비를 비롯한 10명의 유다인 지도자를 여기서 처형했다.

 제2차 유다항쟁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카이사리아를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 관구 행정수도로 삼았다. 카이사리아는 이후 사르센인들이 점령할 때까지 500여 년간 그 역할을 했다.
 

▲ 카이사리아에서 발굴한 빌라도 비문. 이 비문은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유일한 금석문이다.


 ▨사도와 교부들의 도시
 카이사리아는 사도행전의 주요 배경이다. 무엇보다 카이사리아는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이 처음으로 세례받은 곳으로 '이방인 선교의 요람'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가족들이다(사도 10장 참조). 코르넬리우스의 세례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와 결별하는 중대 사건이었다. 이 사실이 예루살렘에 알려지자 모두 유다인이었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긴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자신의 행위가 하느님의 인도로 된 것임을 밝혔다(사도 11장 참조).

 카이사리아는 필리포스 부제의 활동지였다. 그는 이곳을 거점으로 에디오피아 칸다케 여왕의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지중해 연안 도시들에 복음을 선포했다(사도 8,26-40).

 바오로 사도와도 카이사리아는 인연이 깊다. 그는 예루살렘에 설교하다 자신을 죽이려 한 유다인들을 피해 카이사리아로 내려간 다음 타르수스로 갔고(사도 9,26-30),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이곳에 들려 필리포스 부제의 집에 머물렀다(사도 21,8). 또 그는 카이사리아의 제자 몇 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사도 21,16) 성전에서 체포(사도 21,27-23,22)된 후 다시 카이사리아로 호송돼 펠릭스 총독에게 넘겨졌고(사도 23,23-35) 헤로데 궁전 감옥에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그는 펠릭스의 후임자 페스투스 총독와 헤로데 아그리파스 임금 앞에서 변론했고(사도 24-26장), 로마 황제에게 상소해 카이사리아 항구에서 로마로 압송(사도 27,2)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카이사리아는 또한 교부들의 도시였다. 3세기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곳에 신학교를 세워 231년부터 250년까지 20여 년간 제자들을 양성하고, 방대한 저술을 했다. 그 가운데 6개 성경 번역본을 대조해 놓은 「헥사플라」가 가장 유명하다.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4세기 교부 에우세비우스 성인도 이곳 출신이다. 315년에 이곳 주교가 된 그는 325년까지 「교회사」 10권을, 또 성경역사지리서인 「오노마스티콘」을 저술했다.
 또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 대 바실리우스, 히에로니무스 등이 카이사리아에서 수학했다.

 

▲ 카이사리아는 헤로데 임금이 그리스ㆍ로마 문화를 동경해 지은 계획 도시다 .


 ▨십자군 요새
 사르센 제국의 침략으로 카이사리아는 638년 파괴됐다. 30여만 권의 장서가 있던 도서관도 전소됐고, 2만여 명의 유다인과 3만여 명의 사마리아인들이 살던 이 도시는 이슬람 통치시기에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제1차 십자군 전쟁 때 회복된 카이사리아는 강력한 성채로 요새화돼 번영을 누리다가 1187년 살라딘에게 다시 빼앗겼다. 이후 십자군이 1191년 되찾았지만 1265년 다시 무슬림 손에 넘어간 후 더는 전투가 없었다.

  글ㆍ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