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기획특집

이 사람을 보라

참 빛 사랑 2014. 12. 16. 23:02

 

 

차동엽신부님의 <해피 가톨릭 캠페인> 인터넷작성 /그림자

031-985-5677 www.fpi.or.kr



<이 사람을 보라>

1.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 차례 ]

1. 예수는 어떤 인물 이었는가?

1-1. 예수는 결혼을 했는가?

1-2. 과대망상증 환자? 하느님의 아들? 무엇이 맞는가?

1-3. 예수는 정말로 부활했는가?


예수 주변의 여자들


성지 이스라엘 카나의 혼인잔치 기념성당 제대 뒤의 벽화, 성모님과 예수님..

성모님의 간청으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예수님



성지 이스라엘 야곱의 우물-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예수 부활의 첫 목겨자 마리아 막달레나,

'나를 만지지 말라' 영적인 세계와 삶의 세계를 구분하는 말이다.


제기되는 주장들

예수는 결혼을 했을까?

소설 <다빈치 코드>는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다고 언급합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에서도 예수의 오른쪽에 앉은 것은 사도 요한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으며, 그 근거로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예수의 오른쪽의 인물이 몸을 뒤로 젖히면서 예수와 ‘M'자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막

달라를 알리는 영문 첫 자이자 예수와 막달라 간의 결혼(Marriage)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풀어냅니다.

<다빈치 코드>의 추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자녀가 있었는데 그 피를 이은 후손이

아직도 끊이지 않은 채 프랑스에 살아 왔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가톨릭 측 ‘오푸스데이(opusdei)’란

비밀조직이 예수의 후손을 해치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맞서서 예수 집안을 보호하는 비밀조직 ‘시온 수도회’가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 회원(내지 원장)이었다

고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소설의 궁극적인 노림수는 아마도 “예수는 한낱 사람일 뿐이었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어 그리스도교에 타격을

려는 의도인 듯합니다.

사실성 자체에 대해서는 책임질 필요가 없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린 것은 작가의 수준 높은 전락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이들은 소설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서 ‘그럴 수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이 점이 바로 작가가 노린 것이겠지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이가 댄 브라운 뿐만은 아닙니다. 20세기 초반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는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둘을 연인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은 1988년 미국에서 마틴 스콜세즈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그리스도교계의 극렬한 반발을 샀습니다.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역시 둘 사이를 연인 관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진실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 "너희 중에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영지주의 복음서의 내용을 설명하는 학자들조차 <다빈치 코드>에서 다룬 이야기는 픽션일 뿐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가까이 했을 수는 있지만, 그녀가 예수의 아이를 낳고 그 후손들이 메로빙거 왕조를 열었다는

설정은 현실성이나 가능성이 없는 허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영지주의 문헌에도 더 이상의 상상력 비약을 자극하는 문구는 나오지 않습니다.

둘째, 성경 전체가 예수의 독신을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장의 진위는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결혼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서 전체를 보지 않고 지극히 부분적인 대목을 확대 해석해서 객

관성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주장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표적비평 내지 목적지향의 주장입니다. 이들이 하는 행위는 성서가 말하고 있는 바를 끄집어내는 ‘성서 해석’

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성서 안에서 억지로 빼내오는 ‘성서 해적질’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이런 시도들의 위험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라은성, 차동엽 공저, <다빈치 코드의 족보>참조, 여기서 이들의 성서 도용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하고 있음).

그러므로, 성서를 근거로 해서 어떤 주장을 입증하려면 성서 전체에서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한 두 구절을 꼬투리 삼아 주

장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지름길입니다.

복음서에는 결혼 여부가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예수가 독신으로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1-2 과대망상증 환자? 하느님의 아들? 무엇이 맞는가?

재판의 현장

정신병자를 제외하고 역사상 어떤 인간도 자신을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주장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을 예수가 했습니다. 예수는 거짓말을 했는가? 아니면 과대망상증 환자 였을까? 아니면, 진실로 하느님

의 아들이었는가? 바로 이 물음이 최초로 제기 되었던 2000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함께 가 봅시다.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이니"

긴 밤이었다. ‘가야파’라는 대사제와 율법학자들, 그리고 장로들이 그 당대 최고의 거물급(?)인을 심문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 앞에 선 죄인은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한 사람, 바로 ‘예수’였다. 3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들은 마침 내 예수를

체포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가 예수에 대해 전혀 선처를 베풀어줄 의향을 갖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대사제 가야파가 말했다. “나자렛 예수, 그대는 ‘지금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군중들을 선동한 죄목으로 이

재판장에 끌려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고발하는 증인들을 증인석에 세웠다. 예수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오히려 조바심

이 난 가야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에게 물었다.

“예수, 그대는 이 모든 고소내용에 반박하지 않을 작정인가? 당신 자신에 대해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 보라!” 그러나 예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사제가 다시 물었다.

“그대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가?” 재판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예수의 대답을 주목했다. 마침내 예수

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당신이 말 한대로 내가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다. 이제 앞으로 사람의 아들이 권능의 보좌 오른편에

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대답을 듣자마자 대사제는 소리를 질렀다.

“우리 모두가 예수가 신성모독 발언을 하는 것을 방금 다 들었소. 한낱 인간인 주제에 스스로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다니 이렇게

참담할 수가! 여러분이 보기엔 어떻소?” 가야파는 군중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예수를 유죄로 인정해 죽이라고 외쳐

댔다. 예수는 처형당할 때까지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했을까요? 아니면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었

던 것일까요? (<매거진 프로젝트> 참조)


예수는 거짓을 말했는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 거짓이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거짓말을 위해 죽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는 법정에서 ‘거짓’을 인정하면 잔인한 형벌인 십자가형은 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지독한 거짓말쟁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거짓말에 목숨을 바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최후의 숨을

몰아쉬면서도 자신이 유일하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그는 흔들인 적이 없

었습니다.



예수는 과대망상증 환자였는가?


그렇다면 예수는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착각하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었을까요? 정신병자는 말에 조리가

없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그 병의 증세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과 행동에는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복음서들을 비교해 보면 놀라우리만치 조리 정연함이 드러납니다.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반대세력이나 비판자들로부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적대자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꼼짝 못하게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정신

병자의 논리적 솜씨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정신병자의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이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정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는가?

예수가 거짓말쟁이도 아니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정신병자도 아니었다면, 마지막 남은 결론은 하나입니다. 결국 예수의

주장은 진실이라는 하나의 대안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주장한 대로 정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회심하기 이전에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던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 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변증

사도 베드로는 수 천 명이 모여든 예루살렘 광장에서 다음과 같이 예수의 정체에 대해 증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시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을 나타내 셨습니다. [....]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우리는 다

그 증인입니다.”

(공동번역 사도 2,22-32)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향하여 쏟아낸 베드로의 연설을 풀어서 말하면 이런 의미였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 볼지어다. / 들을지어다./ 보는 눈이 있는 자들은 보아라(마태 13,13참조).

/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공동번역 마태 13,9 참조).


볼지어다./ 들을지어다./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을 나타낸”(22절 참조) 이 사람, / 이 사람이 누구인가?

이 사람이 누구인가? /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악령을 쫓아낸 이 사람,

/ 물 위를 걷고 풍랑을 잠재운 이 사람, / 죄인과 창녀와 세리들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준 이 사람 / 물고기 두 마리

빵 다섯 개로 한꺼번에 5천명을 먹인 이 사람, / 죽은 사람을 살려낸 이 사람, /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가?

그가 묻는다. / 대관절 이 사람이 누구인가?

1-3 예수는 정말로 부활했는가?


부활, 어떻게 믿나?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확실한 역사적 정황 증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 대부분이 부활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누구고 자신의 목숨과 관계된 일 앞에서는 ‘진실’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의 부활신앙을 거짓으로 공모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면 이실직고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대부분 자진해서 부활신앙을 증거하다 용감하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 하나로 ‘부활’은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되고도 남습니다.

둘째, 박해자가 부활 체험을 통해 회심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고 자신이 종교적 신념으로 봐도 그렇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난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는 자를 색출하여 처단하러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납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열정적인 증거자로 돌변 하였습니다.

(갈라1,13-16참조)

셋째 유대인의 핵심적인 신앙적 사회적 규범이 부활신앙으로 인해 완전히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죽은 지 5주 후에 10,0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 때문에 그토록 목숨처럼 여기던 신앙적 사회적

규범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순교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 변화의 주요 내용은 다음의 다섯 가지입니다.

‘희생제’를 ‘성찬례’로 대체했고,율법’을 ‘복음’으로, 토요일 ‘안식일’을 일요일 ‘주일’로 유일신’ 신앙을 ‘삼위일체’신앙으로,

승리’의 메시아관을 ‘십자가’ 메시아관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죽음도 불사하고 이뤄냈습니다.

당시 동시대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단지 허위로 조작된 주장 에 저토록 목숨을 걸었을 확률은 제로(0)였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넷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사색적인 사람과 감정적인 사람, 남자와 여자 등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다양한 배경과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

들은 그 만남을 통해 절망에서 희망을, 죽음에서 생명을, 불행에서 행복을 보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죽었던 삶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사건이라고 중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부활이었다.

이렇듯 예수의 부활은 자명합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

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9)

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백번 부활해도 내가 한 번 부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부활이었습니다. 우리를 일으키기 위해 먼저 예수님께서 일으킴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대가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죽음에서, 절망에서, 체념에서, 그래요 전신마비의 무기력에서······



참 소중한 당신께

그리스도의 얼굴

참 소중한 당신, 아마도 당신께서도 한번쯤은 그분의 정체에 대해서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는 누구지?”

알려 드리지요.

예수는 단지 2000년 전의 인물이 아닙니다. 오늘 살아계신 분입니다. 당신이 마음의 문을 열면 언제고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당신께 도움이 될까하여 다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는 실화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말기, 눈에 덮인 중국 오지를 의심에 잠긴 한 사진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는 말 등에서 “오, 오, 주여! 주의 얼굴을 한번 보기만 하면 저는 믿겠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음에서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곳은 눈이 녹기 시작하여 이곳저곳에 검은 땅이 나타나 보기에 흉한 들판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려오는 명령을 따라 그는 말에서 내려 그 장면을 카메라에 잡았다.

집에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했더니 거기에는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

이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자료 : 차동엽신부님의 <해피 가톨릭 캠페인>

타자 : 그림자

편집 : 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