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만자는 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20~30℃까지 떨어져 북경 인근에서 유일하게 눈이 쌓이는 혹한 지역이다. 이런 지형적 특성으로 2022년 북경 동계올림픽 당시 이곳에서 스키경기가 치러졌다.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10월 중순께 서만자 전경.
선교사 선종하며 복음화 희망 사라진 달단
서만자가 있는 달단 지역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중국 북부 내몽고 지역을 일컫는 달단에는 몽골족·만주족·회족이 거주합니다. 만주족과 몽골족은 만리장성 너머에 있습니다. 만주족은 중국인들이 관동(關東)이라 부르는 북동쪽 요동에, 몽골족은 북서쪽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라마교를 믿고 있습니다. 모든 달단인은 외형상으로 중국인들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눈이 더 튀어나왔고, 피부색은 구릿빛에 가까운 붉은색입니다. 그들의 말은 중국어와 다르며 중국인들처럼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지만, 그들 고유의 문자를 갖고 있습니다.
몽골족은 유목민으로서 목축을 주로 합니다. 황야를 떠돌아다니며 천막에서 삽니다. 양식으로는 약간의 곡물과 자기네 가축의 고기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기를 먹었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알리기 위해 기름기가 묻은 손가락을 자신의 옷에다 닦는 습관이 있습니다. 몽골족 달단인은 손님에게 경의를 표할 때 커다란 뼈를 집어 자기가 먼저 뜯어 먹은 다음 그것을 손님에게 줘 뜯어 먹게 합니다. 식사가 끝나면 달단인들은 주인이 먼저 옷깃부터 시작해 아랫단 끝자락까지 자신의 손가락을 닦습니다. 그러면 손님도 똑같이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프랑스 루이 9세 국왕은 원나라 대칸과 동맹을 맺기 위해 두 사절단을 달단에 파견한 바 있습니다. 작은형제회 뤼브레키 수사가 두 번째 사절단장이었습니다. 대칸은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 달단의 왕은 교황께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찬란한 칭호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께 존경심을 보이는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양측 사절단이 서로 오가면서 달단의 대표 몇 사람이 개종해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재위 1271~1276)은 달단에 복음을 알리기 위해 도미니코회 선교사 코르뱅을 파견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개종시켜 세례를 줬습니다. 그는 큰 성과를 거뒀지만 지지를 받지 못해 이곳 선교는 그가 선종한 후 중단되고 맙니다. 얼마 안 있어 달단인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때부터 복음의 멍에에 그들을 묶어 두려던 희망이 온통 다 영원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경교구장이며 북경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조선 교우들이 원하지 않는 이상 조선에 브뤼기에르 주교와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사진은 페레이라 주교가 묵고 있던 북경 남당.
페레이라 주교, 조선 입국 탐탁지 않게 여겨
1834년 11월 13일 조선인 교우들을 만나기 위해 북경으로 갔던 왕 요셉이 아무런 성과 없이 서만자로 왔습니다. 그는 조선인 교우들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북경교구장 서리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편지를 제게 건넸습니다. 그는 서만자의 설 마태오 신부와 왕 요셉에게 저에 대한 불평을 무척이나 늘어놓곤 했습니다. 역시나 그는 편지에서 “그토록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인 서만자에 왔다면 주교님만이 알고 있는 무슨 확실한 이유가 있었어야만 합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변덕스럽게도 모방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선 “서만자가 안전한 장소이므로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낫겠다”고 적었습니다. 제가 산서대목구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페레이라 주교는 여러 핑계를 대면서 제가 조선으로 가는 것을 단념하도록 했었습니다. 그는 산서대목구장 요아킴 살베티 주교에게도 제가 서만자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다며 조선 입국을 말려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모방 신부는 페레이라 주교가 국적에 상관없이 사제들을 조선으로 들여보내는 데 많은 열성을 보이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주교를 대할 때에는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페레이라 주교는 모방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포교성성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북경 근방으로 보내는 바입니다. 조선 교우들이 유럽인들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할 때 내가 당신을 불러 면담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나는 조선 교우들이 당신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페레이라 주교는 샤스탕 신부에게도 같은 약속을 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는 조선 교우들이 유럽인 성직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박해를 두려워하는 조선 교우들은 외모가 닮은 중국인 사제들을 더 원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을 자기 관할권 안에 묶어 두고 세월이 좋아지면 당장 조선으로 떠나도록 도와주겠다고 현혹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 교회의 관할권을 가진 저에게는 북경에 온 조선 교우들과의 만남조차 주선해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조선에 들어가는 순간 조선 교회는 북경교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교회가 되기 때문에 페레이라 주교는 교묘한 말로 저와 조선의 선교사들을 갈라놓고 있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의 의도를 간파한 저는 그에게 포교성성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저에 대한 얘기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포교성성의 의도는 제가 누구보다도 먼저 조선에 입국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왕 요셉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임장을 갖고 1835년 1월 19일 북경에서 유진길·남이관·조신철·김 프란치스코 등 조선 교우들과 만나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에 관한 면담을 했다. 왼쪽부터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남이관 세바스티아노·조신철 가롤로 성인화.
왕 요셉에게 신임장 주고 전권사절로 파견
저는 조선 사절단과 함께 북경으로 오는 조선인 교우들과 면담하기 위해 1835년 1월 9일 왕 요셉을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우리에게 호의적인 의향을 그다지 갖고 있지 않은 몇몇 인물들이 조선 교우들을 농락하기 전에 그들을 붙잡아두려면 미리 알려주는 것이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왕 요셉만이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으나, 그는 추위와 과로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영하 20~30℃의 혹한에도 주저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저는 왕 요셉에게 제 이름으로 교섭할 수 있도록 신임장을 줬습니다. 그를 저의 전권 사절로 임명했습니다. 저는 조선 교우들에게 이렇게 써보냈습니다.
“제가 직접 갈 수 없어서 왕 요셉 선생을 보냅니다. 저를 직접 대하고 의논하듯이 이 분과 면담하십시오. 그는 여러분이 아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신뢰할 만한 사람입니다. 가히 이 분은 언젠가는 여러분의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 이 분이 여러분에게 묻는 말에 ‘그렇다’,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교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지 아닌지를 솔직히 밝히십시오. 애매하거나 조건이 붙은 대답이나 좀 더 숙고할 시간을 달라는 청은 모두 회피하고 부정적인 대답으로 간주할 것이고, 당장 교황님께 편지를 써서 교황님께서 여러분에게 보냈으며 또한 여러분이 직접 청하기도 한 주교를 여러분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보고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를 꼼꼼히 읽고 또 읽은 후 에두르는 말로 찬사를 곁들이지 말고 명료하고 간단한 회답을 바로 보내주십시오.”
이렇게 단호하게 글을 쓴 것은 조선 사람들이 글로 대답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모호함과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저는 왕 요셉에게 몇 가지 질문지를 줬습니다. 조선인들은 중국어를 잘 말하지는 못하지만, 글은 중국인만큼 잘 쓰고 읽습니다.
저는 왕 요셉에게 “조선 교우에게 그들의 주교 외에 다른 선교사에 대한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신중을 기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조선 교우들은 조선에 들어가고자 하는 다른 유럽인 신부, 곧 샤스탕 신부가 북경에 있다는 소식을 이미 요동에서 들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은 그들에게 기쁨을 안겨줬습니다.
왕 요셉, 조선에서 온 교우 4명과 첫 면담
열흘 뒤인 1835년 1월 19일 왕 요셉은 유진길(아우구스티노)·남이관(세바스티아노)·조신철(가롤로)·김 프란치스코 등 조선 교우들과 첫 면담을 했습니다. 그들은 중국인 여항덕 신부를 조선으로 입국시킨 이들입니다. 왕 요셉은 그들에게 저의 신임장을 보여준 후 곧장 면담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여러분의 주교인 갑사 주교님의 합법적인 대표로 인정합니까?”, “예.”
“제가 여러분과 함께 결정적으로 면담할 충분한 권한이 있습니까?”, “예.”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교이신 갑사 주교님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습니까?”, “예.”
남이관 세바스티아노가 이렇게 답하자 갑자기 한 명이 면담장으로 들어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갑사 주교는 절대로 조선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는 유럽인이란 말이요”라며 소리 질렀습니다.
소동이 일자 왕 요셉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넨 누군데 이 일에 참견하는가. 나가! 여기선 자네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라고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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