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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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복음

[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14주일 - 약함의 위력

참 빛 사랑 2024. 7. 10. 17:16
 
렘브란트 작 ‘설교하는 그리스도’, 1646~1650년.


예수님께서 고향 땅 나자렛에서 가르치시자 나자렛의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걸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마르 6,2) 그러고 나서 그들은 이내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나자렛 사람들은 충실하게 유다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도자들에게 배워 알고 있던 구세주는 예수님과 사뭇 다른 존재였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전사처럼 원수들을 쳐부수고, 막강한 능력을 지닌 군주로서 위력적인 권세를 떨치며 백성을 해방하고 현실적인 부유와 풍요를 베풀어 줄 수 있는 실력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하고 마음이 움직이지만, 곧바로 편협한 아집의 세계로 되돌아왔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치에 대한 이런 이중적인 감정이 있지 않을까요? 그곳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몇몇 병자를 고쳐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기적을 너무 많이 베풀면 그들이 잘못 배워 알고 있던 막강한 위력의 메시아 상을 옳은 것으로 더욱 착각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약함을 통해서도 당신의 구원 메시지를 전달하시고 구원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야말로 진정으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를 알아야 진정한 구원과 해방을 얻게 되는 것이 인생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한없이 약한 어린양이 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2코린 12,10) 그러고 보면 사실 눈에 보이는 강함과 약함은 진정한 권능을 지니는 것과 상반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러셨듯이 평범한 이웃들 안에 하느님께서 존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천군만마를 이끌고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동네 목수가 하느님입니다. 우리 동네에 같이 사는 철수와 영희의 오빠나 누이나 동생이 하느님입니다.

오늘 첫째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뽑으시면서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언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기적을 행하는 것도, 미래를 알아맞히는 것도, 자신의 찬란한 이론을 설파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의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하느님의 가치 서열 기준이 주는 참 행복의 맛을 알아가야 합니다.

이번 주는 나와 평범한 이웃들의 약함에 담겨 있는 진정한 위력을 더욱 깊이 깨달으며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심어주신 창조주 하느님의 본성이 발현됩니다.


 

이경상 주교(서울대교구 보좌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