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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미동맹의 상징’ 웨버 대령 을지무공훈장 추서 주도한 주인공

참 빛 사랑 2024. 6. 19. 16:46
 
 
서울 한미동맹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신경수 사무총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웨버 대령은
미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비 건립 주도
추모의 벽에 카투사 전사자 이름도 올려


한미동맹과 신앙생활
미군 가톨릭신자들에게 많은 도움 받아
2017년부터 콜럼버스 기사단 본격 참여
생명 대행진·복시시설 봉사 등 적극 실천


젊은 사람일수록 시간 내서 봉사하며 기쁨 찾아야
바쁜 현대사회에서 ‘조금 늦추고 남을 돕자’



한미동맹재단이 올해 초 6·25전쟁 참전용사인 고 윌리엄 웨버(William Weber, 1925~2022) 대령에게 을지무공훈장 추서를 정부에 요청했다. 웨버 대령은 1951년 2월 강원도 원주전투에서 오른팔과 다리를 잃으면서도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웨버 대령은 1980년 전역 후 한국전 참전용사기념재단 회장을 맡아 미국 워싱턴 D.C. 소재 한국전 참전비 ''19인의 용사상'' 건립을 주도하는 등 한미동맹의 상징적 인물로 꼽힌다. 그의 훈장 추서를 주도한 이는 한미동맹재단 신경수(아우구스티노, 63) 사무총장. 콜럼버스기사단 한국 의장으로 생명운동을 펼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톡터뷰’ 인물로 신경수 사무총장을 택했다.



윌리엄 웨버, 워싱턴 D.C. ‘19인의 용사상’과 ‘추모의 벽’ 건립 주인공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수부대 장교(대위)로 참전한 웨버 대령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서 활약했다. 이듬해인 1951년 2월에는 강원도 원주에서 인민군과 싸우다 수류탄 공격에 오른팔을, 후송 중 다시 포탄을 맞아 오른발을 잃었다. 그는 1년여간 수술 끝에 군에 복귀했다. 남북전쟁 후 그렇게 엄청난 중상을 입고도 현역으로 복귀한 인물은 그가 처음이라고 들었다.

1980년 전역한 그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전우들을 기리려했다. 하지만 한국전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도 딱히 없었다. 1993년 한국전 참전용사기념재단(KWVMF) 회장을 맡은 웨버는 미국 워싱턴 D.C.에 한국전 참전비 ''19인의 용사상'' 건립을 주도했다. 전쟁 때 숨진 카투사 전사자 7600여 명이 미군 전사자 3만 3600여 명과 나란히 추모의 벽에 올라간 것도 그의 헌신 덕분이었다.

그는 2006년 ‘미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벽’ 건립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 법률에 따르면, 국립공원이 조성된 뒤 추가로 조형물을 설치하는 건 위법이었다. 세 차례 시도 끝에 법안이 의회를 통과했고, 마침내 2021년 ‘추모의 벽’ 공사가 끝났다. 제1·2차 세계 대전, 월남전 등 미군이 참전한 전쟁 기념비에 외국인 이름이 들어간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웨버의 노력으로 이 일대는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인사들이 워싱턴 방문 때마다 꼭 참배하는 한미동맹의 상징적인 곳이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웨버는 치매로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웨버 대령의 주도로 건립된 워싱턴DC 한국전 참전비 ‘19인의 용사상’. 출처=참전용사기념재단(KWVMF)

파주 임진각 보훈단지에 세워진 웨버 대령 추모비. 출처=한미동맹재단

생명운동에 참여한 한국 콜럼버스 기사단


을지무공훈장 추서에 나선 한미동맹재단

웨버 대령은 2022년 4월 별세해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미국 국민에게 잊힌 전쟁으로 인식되었던 한국전쟁의 가치와 한미동맹을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그를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2016년 11월까지 3년간 주미대사관 국방무관을 지낸 신경수 예비역 육군 소장이다. 2017년 예편 후 한미동맹재단 사무총장을 맡은 그는 웨버 대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나섰다.

신 총장은 한미동맹 70주년인 지난해 재단 주도로 SK그룹 협조를 받아 파주 임진각 보훈단지에 추모비를 세웠다. 올 초엔 을지무공훈장 추서를 정부에 요청했다. 을지무공훈장은 다섯등급의 무공훈장 중 2등급에 해당한다. 전시 또는 전시에 준하는 비상사태 때 참전해 무공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국가보훈부가 이를 받아들여 국방부에 전달했고 행정안전부 심의를 거쳐 추서가 확정됐다.

정부는 6·25전쟁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을 하루 앞둔 26일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에서 웨버의 유일한 후손인 손녀 데인 웨버(33세)씨에게 훈장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날 웨버 대령 유품 전시회도 개최한다. 유품은 국가보훈부가 모두 인수한 상태다. 앞서 그는 미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2등급)과 퍼플하트를 받았다. 퍼플하트는 미군으로 복무하다 사망하거나 다친 사람에게 미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으로 명예와 권위를 인정받는다. 신 총장은 “웨버 대령은 한국전쟁 이후 이를 승리한 전쟁으로 새롭게 인식시킨 분”이라며 “훈장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가톨릭 신앙과 한미동맹

신 총장은 콜럼버스 기사단 한국 의장을 맡고 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1882년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 19개국 200만 명의 형제 기사들이 활동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가톨릭 남성 신심 봉사단체다. 한국에는 2012년 당시 군종교구장 유수일 주교, 서상범(현 군종교구장) 신부 지도로 체계를 갖췄고, 2015년 서울대교구 인준을 받았다.

그가 콜럼버스 기사단을 처음 접한 것은 2012년 가톨릭 신자였던 미8군 부사령관 캄보이 준장과 만난 후다. 가족 모두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서로를 위하며 봉사하는 모습에 크게 감동해 2017년 전역 후 기사단 활동에 본격 참여했다.

신 총장은 “한미동맹과 저의 신앙활동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군 생활 때나 재단의 일을 하면서 미군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 기사단은 한미 합동으로 전례를 한다.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쓰고, 미군과 가족이 행사에 참여한다.

신 총장은 현재 주한미군에는 적지 않은 콜럼버스 기사단원이 있다고 귀띔했다.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인 폴 러캐머라 대장이 대학에 다닐 때 콜럼버스 기사였습니다. 임관 후 활동이 뜸했지만, 올해 전역 후엔 기사단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죠. 한미연합사를 지휘하는 인도태평양사령부 사령관으로 최근 취임한 새뮤얼 퍼파로 대장도 단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젊은 남성 봉사자 더 늘었으면

콜럼버스 기사단은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에 역점을 둔다. 전 세계 기사단 공통분모다. 아이티에서 지진이 났을 때 피해자 지원을 위해 거액을 모금했고, 태풍 피해를 본 필리핀 주민에겐 집과 배를 마련해 전달했다. 한국 기사단이 ‘생명을 위한 40일 기도’와 ‘생명 대행진’에 참가하고, 성가정입양원이나 성모원 등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하는 것도 같은 차원이다. 신 총장은 신앙에 있어 특별히 ‘아버지’ 역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가장으로서 아버지는 성가정을 위한 중요한 존재임을 모두 더욱 인식해야 합니다. 보통 집에서 어머니가 자녀교육을 도맡아 하다보니 아버지가 신앙의 중요성을 잘 전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죠. 그러나 아버지가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는 집은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신앙 안에 머무는 사례가 더욱 많다고 합니다. 기사단 내에서도 남성으로서 이러한 역할을 더욱 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또 젊은 사람일수록 시간을 내서 봉사해야 합니다. 거기서 기쁨을 찾고 그 에너지로 자기 일에 도움되도록 해야 합니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조금 늦추고 남을 돕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경수 사무총장은

서울 우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40기로 입교했다. 1984년 소위로 임관, 1996년 미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했다. 21사단 수색대대장, 1사단 11보병연대장, 자이툰부대 민사협조본부장, 국방부 국제정책차장, 주미대사관 무관을 지냈고, 영국왕립안보연구소, 미국 태평양전략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삶의 지표는 ‘당신의 생각이 당신 뜻대로 여기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주님의 기도’다.

raelly1@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