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에도 꺾이지 않은 신앙의 증거터
▲ 성당 들머리 입구 대문.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교자들을 형상화했다.
▲ 성당 마당에 설치된 순교자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굳건한 순교자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
▲ 절두산 순교성지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종탑은 칼 형구 모양을 형상화했다. |
▲ 성당 제대 바로 아래에 있는 지하 성인 유해실. 27위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
▲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내부는 온통 하얗다. 순교자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드러낸다. |
▲ 이규남 교수의 제대 중앙 장미창. 성 김효주ㆍ효임 자매의 순교를 표현했다. |
순교는 하느님께서 주신 최상의 은총이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최고 표현이다. 순교는 아울러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하는 종말론적 표징이다. 이런 이유로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땅 위에 세워진 성당은 성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하고 복된 공간이 되며 하느님과 일치를 드러내는 종말론적 표징이 된다. 그 대표적 성당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울 합정동 버들꽃나루(楊花津) 절두산순교성지에 봉헌된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이다.
성당은 올해로 만 50년이 된 교회 건축물이다. 설계는 이희태(요한, 1925~1981, 서울대 미대) 교수가 했다. 서울대교구 혜화동성당을 설계한 이다.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은 한국 건축의 토착성과 고유미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회랑의 배흘림기둥, 초가지붕 모양의 추녀, 갓 형태의 외형은 언제 가도 포근한 외가 같은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칼 형구(刑具) 모양의 종탑과 그 꼭대기에 서 있는 십자가의 단순미는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의 속도도 줄이게 한다. 먼발치에서 봐도 성당의 외형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거룩한 장소임을 드러내는 표징이 눈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성당 내부는 온통 하얗다. 하느님과 일치한 순교자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드러낸다. 대리석 제대와 제단 십자가, 종탑의 순교자상은 김세중(프란치스코, 1928~1986) 선생의 작품이다. 돌 제대는 순교자들의 굳건한 믿음을 웅변한다. 그리고 칼 모양의 독서대는 목숨을 바쳐 증거한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지금 여기서 선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단 위 장미창의 ‘성 김효임 골룸바ㆍ효주 아녜스 자매 순교’ 색유리화, 성당 양면 창틀의 ‘순교자’ 색유리화, 그리고 성가대석의 ‘순교’ 색유리화는 한국 색유리화의 선구자 이남규(루카, 1932~1993) 선생이 제작했다. 서울대교구 중림동약현성당에도 성 김효주ㆍ효임 자매를 주제로 한 그의 또 다른 색유리화 작품이 설치돼 있다. 성당 내 십자가의 길 14처는 최의순(요한 비안네) 서울대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그의 대표적 성미술품은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가운데 정문 동판 부조이다. 성당 내 모든 성미술품은 화려하지 않다. 순교자들이 그리스도께 향한 단순한 완덕의 삶을 살았듯이 성미술품 모두가 꾸밈이 없다.
제대 바로 아래 지하 경당에는 성인 유해실이 마련돼 있다. 앵베르ㆍ베르뇌ㆍ다블뤼 주교와 김대건ㆍ모방ㆍ샤스탕 신부,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27위 순교 성인이 모셔져 있다.
성당 들머리에는 이곳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상이 있다. 1866년 10월 23일 순교한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이쁜(마리아), 아들 이붕익(베드로)이다. 최종태(요셉) 교수의 작품이다. 양손이 밧줄에 묶인 채 목이 잘린 이들의 모습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성지의 성 김대건 신부상은 전뢰진 홍익대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대전교구 솔뫼성지에도 그가 만든 성 김대건 신부 동상이 있다.
버들꽃나루 절두산순교성지는 1997년 11월에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됐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 모래톱에 형성된 이 나루는 붉은 노을이 아름다워 마포 8경에 속했다. 이곳은 왕족과 사대부, 시인 묵객뿐 아니라 중국 사신들이 꼭 둘러보고 갈 정도로 사랑받던 명소였다. 한강 변에 불쑥 솟은 형세가 마치 누에가 머리를 쳐든 모양 같다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 했다. 겸재 정선이 「양화환도」(楊花喚渡)를 남길 만큼 경치가 빼어난 버들꽃나루 잠두봉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인들의 처형지가 되면서 ‘절두산’(切頭山)이라고 불렸다.
1866년 9월 프랑스 함대가 조선 선교사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들의 도움으로 한강을 타고 버들꽃나루까지 침략했을 뿐 아니라 10월에는 강화도를 약탈하자 흥선 대원군은 그 책임을 물어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다 이곳에서 처형했다. 처형은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이뤄졌다. 이곳에서 1만여 명이 순교했다고들 하나 조정의 공식 자료에는 이의송(프란치스코)을 비롯한 29명을 6차례에 나눠 처형했다고 기록돼 있다. 교회 역사학자들은 1865년 조선 천주교회 신자 수가 총 2만 3000명인 것을 고려할 때 절두산에서만 1만여 명이 순교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무명 순교자들을 포함해 100~200여 명이 이곳에서 순교했으리라 추정한다.
글,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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