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부 식당에서 혼자 식사할 때 성호를 긋는 것이 꺼려지는 것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이지 않을까 싶다. 기차나 비행기 여행 중에 시간 전례(성무일도)를 바칠 때 성호를 긋는 것이 조심스럽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마르 8,38) 이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가톨릭 신자로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예수님과 그분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은 아닌지 묻게 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신앙은 나에게 어떤 것이며,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신앙은 내 삶에서 무엇을 바꾸었나’ 하고 질문을 던지면, 막상 떠오르는 것이 없다. 아마도 신앙 안에 깊이 들어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군인 시절 주일 미사에 참여할 수 없었을 때, 평소엔 잘 느끼지 못했던 미사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살면서 겪는 위기와 시련은 신앙이 어떤 의미와 힘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순간들이다. 필자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동반하면서 그것을 경험했다. 물론 신앙이 즉각적인 힘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한참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실 때, 하느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드려보라는 필자의 말에 어머니는 답하셨다. “아무 소용없어.” 우울감에 빠진 어머니에게 힘을 좀 내시고 밝게 웃으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답하신다. “신부님이 아파봐.” 신앙도 긴 병 앞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희망할 것이 없을 때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데 어머니와 힘겨운 마지막 날들을 지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기도해주고 도움을 주신 수많은 분들이 곁에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집에서 병원으로,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가면서 곳곳에 주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이 계심을 알았다. 다만 주님의 손길에 맡겨드리기만 하면 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주님께서 알아서 채워주셨다. 신앙이 없었다면 못 알아보았을 수많은 은총의 순간들이었다.
당시 어머니와 함께 걸은 길을 적어놓은 필자의 노트를 최근에 발견하였다.
“요양보호사 자매님께서 청국장 찌개를 끓여주셨다. 어머니 대녀가 케이크 한 조각을 가져오셨다.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는데 사장님께서 물김치를 선물로 주셨다. 가게 문을 닫고 아버지께서 집으로 오시며 빵 가게 아주머니가 남은 빵을 한 보따리 주셨다고 가져오셨다. 가게에 어떤 자매님이 주신 반찬을 깜빡 잊고 가져오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셨다. 큰이모께서 전화하셔서 고등어가 필요하냐고 물으시니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대답하셨다. 내가 내일 학교로 가져갈 품목이 늘었다. 상추, 쑥갓, 떡국 떡, 아로니아⋯. 은총에 은총이 차고 흘러넘친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은총의 선물들이 쏟아진다. 오늘을 살게 하는 기적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눈을 열어준다. 특히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하느님 은총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은 당신 자녀를 돌보고 보살피시며 배불리 먹이시는 분, 한없이 자비하시고 은총에 은총을 더해주시는 분이시다.
무뎌진 마음 때문에, 때로는 시련으로 인해 하느님 은총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간절히 청해도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느님이 계시는 것일까’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는다. 우리가 넘치고 넘치는 은총 속에 살고 있음을.
신앙이 없었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흘러넘치는 은총을 매 순간 헤아릴 수 있기를 청해본다. 이제 자랑스러운 신앙을 당당히 드러내며 성호를 그을 수 있지 않을까.
한민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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