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교 신학 유산 탁월하게 종합한 학자
2000년이 넘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발자취 안에서 교회는 보물과도 같은 수많은 학자를 탄생시켰다. 초기 교회의 교부 시대와 중세 스콜라 시대의 학자들, 그리고 근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 수호와 풍성하고 깊은 진리 탐구를 위해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헌신했다. 이러한 학자들 중 특별히 빛나는 한 사람을 꼽으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이름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거론된다.
중세 스콜라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 탐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5 ~1274)는 초기 교회 교부들로부터 이어져 온 그리스도교 신학의 수많은 유산을 탁월하게 종합한 학자다. 13세기라는 서양의 학문적 황금기이자 전환점의 한가운데에 존재했던 성인은 파리대학 등과 같은 대학의 발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재발견 등으로 학문적 번영을 이룬 시기의 중심에 있었지만, 교황권과 왕권 간의 긴장, 재속 사제와 탁발 수도회 사이 갈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 또한 직면해야 했다.
이러한 급속한 시대적 변화 안에서 성인이 그토록 위대한 신학적 공헌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진리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이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온몸과 마음을 다해 탐구하고, 이를 더욱 많은 이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한평생을 다했던 성인은 하느님의 진리를 향한 불타오르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진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시간 그 이상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할애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분명 신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든 신학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일 것이다.
앞으로의 삶에 결정적 영향 미칠 두 가지 만남
1224년(혹은 1225년) 이탈리아 아퀴노 근처 로카세카 성에서 귀족 집안의 한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섯 살 무렵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보내진다. 성인의 부모는 아들이 그곳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 가문에 크게 공헌하기를 바랐다. 이후 1239년 열다섯 살이 되던 무렵, 성인은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하게 된다. 성인은 그곳에서 앞으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두 가지 만남을 가진다.
첫 번째는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들과의 만남이었다. 탁발 수도회의 하나로서, 카타리파와 알비파와 같은 당시 이단들의 위협에 맞서 그리스도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성 도미니코(1170 ~1221)가 설립한 도미니코 수도회(정식 명칭 : 설교자들의 수도회·Ordo Praedicatorum)는 진리의 갑옷을 입고 복음적 청빈을 방패 삼아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고자 하는 사명을 지닌 수도회다.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설교’라는 수도회 사명은 당시 시대적 요청에 대한 간절한 응답이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올바른 진리 안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성 도미니코의 사명이기도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폴리에서의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성 도미니코의 정신과 사명, 그리고 도미니코 수도회의 생활방식에 깊은 울림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성인을 그 수도회에 끌리게끔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탁발 수도회로서 추구한 복음적 청빈의 삶과 특히 복음 설교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진리에 대한 탐구가 성인을 도미니코 수도회의 한 형제가 되게 한 결정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도미니코 수도회에는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설교’라는 사명 아래, 이를 탄탄히 떠받치는 몇 가지 기둥들이 존재한다. 즉 수도회 형제들의 공동체 생활, 공동 전례와 개인 기도(관상 기도) 생활, 복음삼덕 서원의 준수, 그리고 하느님 진리에 대한 근면한 탐구, 곧 공부가 그것이다. 실제 도미니코 수도회 이전에 다른 어떤 수도회도 설교를 수도회의 사명이자 목적으로 선택한 수도회가 없었고, 더욱이 공부를 수도회 사명을 위한 핵심으로 선택한 수도회도 없었다. 공부, 즉 하느님 진리에 대한 탐구는 당시 이단들에 맞서 그리스도인들을 구하기 위한 강한 시대적 요청이었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갈 올바른 길을 비춰줄 등대와도 같았다.
탄탄대로의 길 버리고 도미니칸이 되다
결국 1244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이 될 수도 있었던 탄탄대로의 길 대신, 아무런 영예도 없던 신생 수도원의 한 형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평생을 진리 탐구를 비롯해 공동체 생활과 기도 생활, 서원 준수를 하며 살아가는 도미니칸들의 삶의 방식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실히 따랐으며, 성인이 보여준 도미니칸으로서의 삶의 방식은 이후 모든 도미니코 수도회 형제들의 모범이 됐다. 진리에 대한 그의 사랑 또한 성인의 도미니코 수도회 입회 이후 본격적으로 꽃피워진다.
한편 나폴리에서 성인이 마주한 또 하나의 만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의 만남이다. 이 만남은 앞으로 이 ‘천사적 박사’의 학문적 발전과 나아감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만남이자, 진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여러모로 도와줄 만남이었다.

※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코너는 필자 사정으로 3월 한 달 동안 쉽니다. 대신 도미니코수도회 권성환 신부의 글을 5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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