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단순히 첫 번째 열린 공의회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 놀라운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임을 확신했습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과 할례가 거부되지 않듯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과 할례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와 갈라서지 않았고, 안티오키아 교회 역시 예루살렘 교회와 연대를 지속합니다. 이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로운 그리스도교를 선포하기 시작했고, 사도들의 전승 안에 머물 수 있게 됐지요.
바오로 사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방인 선교를 알아보기에 앞서 짧게 유다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가 역사 과정을 어떻게 거치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네 복음서도 밝히고 있듯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때에도 유다인들은 로마군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자처했고 사두가이파와 사제 계급이 모든 메시아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지요.
여기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터집니다. 66년 유다 총독 플로루스가 덜 걷힌 세금을 메꾸고자 예루살렘 성전 보물을 약탈합니다. 유다인들이 들고 일어났죠. 봉기 가담자들은 예루살렘 안토니아 요새와 헤로데 궁에 불을 지르고 로마군을 살해합니다. 그러자 로마 네로 황제의 명을 받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3개 군단 병사 6만 명을 이끌고 팔레스티나로 진군해 유다인들을 잔인하게 진압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가 죽자 황제 자리에 올랐고, 그의 아들 티투스가 원정을 마무리합니다. 티투스는 70년 8월 예루살렘을 함락합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30㎞ 떨어진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73년 모두 자살합니다. 이로써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이 막을 내립니다. 로마인들은 이 승리를 기념해 콜로세움과 포룸 로마눔(로마 광장) 사이에 ‘티투스 개선문’을 세웁니다. 유다는 시리아에서 분리돼 로마 제10군단이 주둔했고, 대부분 땅은 로마 황제에게 귀속됐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을 함락한 바빌로니아 제국 네부카드네자르가 그랬듯 철저히 파괴되고 이교화됐습니다. 예루살렘 땅에는 ‘콜로니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이름으로 새 도시가 건설됐습니다. 유다인들이 이 도시에 들어오거나 주변을 서성이면 사형에 처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역시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성전은 약탈당했고 불탔습니다. ‘유다인세’란 이름의 성전세만 남았습니다. 이 성전세도 로마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유피테르 신전 재물로 보내졌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철저히 파괴됨으로써 그곳에 살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도 토대를 잃고 맙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 교회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그 지위를 잃게 된 것이지요. 다행히 예루살렘 교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도성이 함락되기 전 요르단 건너편 데카폴리스 협곡지대 펠라로 피신합니다.
“우리 구세주께서 승천하신 뒤 맨 먼저 예루살렘의 주교직을 맡은 야고보가 앞에서 말한 대로 살해되자, 다른 사도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수많은 위험을 겪은 뒤 유다 땅을 떠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갔다.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은 계시를 통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도시를 떠나 펠라라는 페레아 도시에 정주하라는 예언을 받았다. 그 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3,5,2-3)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왜 갈릴래아 호수 동편 이방인들이 살던 데카폴리스로 피신했을까요?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셨지요.(마르 7,31-37 참조) 이곳에 사는 이방인들도 예수님에 관해 이미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을 선교 거점으로 삼은 것이지요. 또 이곳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래아와 인접해 있습니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교회의 뿌리가 예루살렘과 더불어 갈릴래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데카폴리스 지역으로 피신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베로이아와 사해 인근에서 선교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전쟁 이후 상황이 진정된 뒤 유다 땅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에 콜로니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이교도화된 로마 도시가 건설되자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빈자리를 메꿉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공동체가 되어 옛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구별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설명할 땐 ‘예루살렘 교회’라는 말을 빼겠습니다. 이때부터 두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얼마 가지 않아 유다교의 여러 종파와 혼합됩니다. 유다교로부터 공적 이단으로 배척받고, 교회 안에서도 잊힙니다. 이들 중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사도 15,5) 몇몇 율법 중심의 보수적인 무리가 사도 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의 주장을 펼쳐 사도행전과 신약 성경 여러 서간에서 ‘거짓 형제들’로 배척받게 됩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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