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1년 신유박해 때 생긴 유서 깊은 교우촌
하우현성당은 서울과 경기도를 잇는 청계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이 선포됐던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교우들이 숨어 살며 신앙생활을 지켜오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성 볼리외 신부와 복자 한덕운(토마스)·하느님의 종 서태순(아우구스티노)·이조이(요셉)·순교자 김준원(아니체도) 등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1893년 하우현 교우촌에 공소가 설립됐고, 이듬해인 1894년 제2대 주임 조제프 알릭 신부와 교우들이 1500냥을 모금해 10칸 규모의 목조식 초가 공소를 지었다. 이후 1900년에 왕림과 미리내본당에 이어 하우현 공소가 오늘날 수원교구의 세 번째 본당으로 승격됐다. 1906년 성당 뒤편에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사제관이 지어졌다. 한옥의 기본 틀인 목조 건물로 지었지만, 벽체를 화강석으로 치장했다. 또 팔작지붕 형식을 갖췄지만, 지붕 처마 선의 곡선은 없다. 그리고 사제관 중앙 거실 좌우로 온돌을 깔아 방과 식당을 배치했다. 이처럼 독특한 건축양식이 인정돼 2001년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 등록됐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3월 24일부터 28일까지 하우현성당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주임 르 각(Le gac) 신부와 교우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르 각 신부는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인연이 깊다. 바로 안중근의 출신 본당인 황해도 청계본당 인근 재령본당 주임으로 사목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을 지켜보고 더는 애국계몽운동만으로 국권을 회복할 수 없음을 절감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동포들과 연대해 해외 여러 나라에 우리나라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기회를 봐서 의거를 일으켜 나라를 구할 목적이었다.
안 의사는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자 상해의 한 성당에 갔다가 그곳에서 르 각 신부를 만났다. 르 각 신부는 안 의사로부터 망명 경위를 듣고 “나라를 구하려면 나라를 떠나서는 안 되고, 오히려 나라에 남아 있으면서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력만이 구국의 길”이란 말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안 의사는 르 각 신부의 충고를 따르기로 하고 즉시 귀국했다.

청계산 자락에 초가 성당과 사제관 건립
베버 총아빠스는 아직 박해시대 교우촌 삶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하우현본당 신자들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아 10장이 넘는 사진을 남겼다. 이번 호부터 2회에 걸쳐 베버 총아빠스의 글과 사진으로 하우현 교우촌을 기행한다.
“산골짜기가 길을 열었다. 멀리 뒤로는 거산이 견고하고 푸른 벽처럼 귀로를 막았다. 앞쪽이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저쪽 산자락에 작은 하우고개성당이 있다고 했다. 한무리의 아이들이 선생님을 앞세우고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맹렬한 기세로 뛰어오다가 우리 앞에 서더니, 이 나라 법도에 따라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조아리는 인사를 했다. 이어 남자들도 오고,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 긴 행렬을 이루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90~191쪽)
하우현 신자들의 조상들은 박해를 피해 이 깊은 산골에 삶 터를 닦았다. 베버 총아빠스는 마을 입구에서 성당과 사제관을 배경으로 교우촌 전경을 촬영했다.<사진 1> 산자락에 있는 초가가 성당이고 그 오른편 석조 초가가 사제관이다. 이를 중심으로 반경 5시간 거리의 여러 마을에 교우 2500여 명이 살았다. 성당은 초가지붕에 막돌과 진흙으로 궁색하게 벽을 쌓은 나지막한 토담집이었다. 문턱도 낮아 몸을 굽혀야만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실내는 좁고 초라했다. 천장에는 생나무 들보가 튀어나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울퉁불퉁한 기둥이 들보를 받치고 있었다. 장식이라곤 낡은 양탄자로 제대 네 면을 두른 것이 전부였다. 작고 소박한 갈색 십자가는 십자가의 길이 지닌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는 듯했다. 문과 창문들은 가느다란 나무 격자로 되어 있었다. 문과 창문의 격자 위에 바른 창호지에 석양이 비치었다. 전면에 있는 제대 옆 창문 두 개는 붉은 색유리였다. 색유리를 통해 신비스러운 빛이 장엄한 어스름 속으로 들어왔다. 그 빛은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하는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견고한 후광을 띤 보석과도 같은 신앙의 열정이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93쪽)

성당 옆으로 막 완공된 사제관이 서 있다. 르 각 신부가 소박한 이 사제관에서 생활하기 훨씬 이전 그의 대선배인 파리외방전교회 볼리외 신부가 이곳 둔토리 동굴에 숨어 살며 조선말과 글을 배우고, 교우들에게 미사와 성사를 집전했다. 르 각 신부는 볼리외 신부와 영적으로 닮은 사제였다. 베버 총아빠스는 르 각 신부를 ‘신자들의 아버지’라고 표현했다.<사진 2> 그는 사제관을 신자들에게 늘 개방했다. 바스크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장난기 넘치는 표정과 버선과 짚신을 신고 있는 천진난만하고 친근한 태도에서 드러나듯 르 각 신부는 착한 영적 목자였다.
볼리외 신부가 은거했던 둔토리 동굴 순례
“한국에서는 자녀와 손자 등 모든 가족 구성원이 가장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모여 산다. 이런 가부장적 삶의 태도가 본당 공동체의 영적 아버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아들딸과 그 자녀들까지 60여 명이, 또는 그 이상이 한데 모여 사는 일이 한국에서는 드물지 않다. 초가를 붙여 짓고 조그마한 마당만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본당 신부 집은 모든 신자에게 아버지 집이나 마찬가지였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94쪽) <사진 3>

베버 총아빠스 일행은 1911년 3월 27일 하우현 교우촌을 떠나기 전날 볼리외 신부가 은거했던 둔토리 동굴을 물어물어 찾아가 순례를 했다.<사진 4> “가쁜 숨을 몰아쉬며 관목 덤불과 돌길을 헤쳐나갔다. 독일 숲이나 아프리카 밀림에서 그랬듯이 이곳의 가시덤불도 고대 독일의 룬문자처럼 양손을 할퀴어 벌써 피가 난다. 박해에 쫓긴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조언을 주려고 볼리외 신부의 영적 열정과 사도적 사랑이 이 길을 걸었다. 그러나 야만적 증오도 이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찾아내어, 수배 중인 그리스도인들을 어두운 동굴에서 끌어낼 때까지 가시덤불을 헤치고 길을 여는 데 지칠 줄을 몰랐다. 지금 우리는 그 자리에 있다. 이끼가 덮이고, 검은 틈새로 마른 덤불이 삐져나온 수직 암벽에, 높이 1.5m, 너비 3m의 어두운 구멍이 나 있었다. 관목과 담쟁이덩굴이 입구를 막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습한 바닥에 차갑고 음습한 바위들이 늘어서 있었다. 동굴은 약 5m 깊이로 검은 쐐기처럼 암벽을 파고들었다. 1866년 초의 대규모 박해 때 젊은 볼리외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위험해질까 봐 이곳에 은거했다. 여기 숨어서라도 그들을 돕고 싶었다. (⋯) 어느새 해가 가까운 산꼭대기를 뉘엿뉘엿 넘어가며 이 숭고한 장소를 어서 떠나라 이른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04~206쪽)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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