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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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제12회 신앙체험수기] 대상- ‘하느님의 일’은 어떻게 해야 하나?

참 빛 사랑 2025. 2. 19. 18:54
 



‘가타리나님, 헌 옷과 헌 신발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랍니다.’

소피아 수녀님이 보내온 문자다. 소피아 수녀님은 파키스탄 남쪽 대도시인 카라치의 성당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계신다.

그 문자를 본 나는 수녀님이 좀 까다롭다고 싫은 소리를 했다. 또 헌 옷 박스를 들여다보면서 이걸 모으느라고 얼마나 수고했는지 모른다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내가 모은 헌 옷은 새 옷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명 브랜드 운동화도 있었다. 겨울왕국에 나오는 인형도 여러 개 모았다. 어렵사리 구한 것인데 필요하지 않다니, 너무한다 싶었다.

‘무엇이든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며 자선을 베풀려고 했는데, 거절하니 맥이 쭉 빠졌다.

나는 내가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고 눈을 흘겼다. 나뿐만 아니라 도움이 되고 싶어했던 성당 다른 신자들의 정성도 몰라주니 못내 섭섭했다. 우리는 헐벗은 아이들에게 당장 옷을 입혀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사정을 모르는 옆집 신자분이 또 헌 옷 박스를 들고 와 벨을 누르셨다.

“젊었을 때 제가 쓰던 실크 스카프랍니다.”

오색 스카프가 가득 찬 박스였다. 난감했지만 나는 정다운 미소를 지으며 반색했다.

“아, 정말 아름다운 스카프네요!”

우리는 서로의 자선에 감탄하면서 감상에 젖었다. 참빛이 저 멀리 있는 이들에게까지 비춰지는 일에 우리가 기울여온 정성과 마음씀에 대해 서로를 칭찬하기도 했다.

새해 들어 우리 성당의 신자들은 헌 옷, 헌 신발, 헌 인형을 모아주었다. 이것은 내가 카라치에서 찍어온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 속 가난한 아이들의 일상을 보고 너나 없이 헌 옷 모으기에 동참한 것이다. 우리한테는 필요가 없지만, 그곳에선 이런 사소한 물품들이 정말 필요하리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심지어 쓰다만 화장품이나 손자들 헌 속옷까지 모아준 분도 계셨다. 가난할 때는 속옷도 변변치 않다는 것이다. 연세가 있으시니,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우리나라의 50년대를 떠올리신 듯하다. 그 시절의 자신에게 당장 주고 싶었던 물건들일지도 모른다.

며칠이 흘렀다. 이제 카라치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막막해 힘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주일날 미사 때였다. 주보를 보고 나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성모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복되심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부터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받아들이려는 삶을 사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성모님처럼 카라치의 아이들을 마음에 잉태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부터 제대로 알아야 할 터였다.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은 이렇게 풍요로워졌는데 왜 굶주림이 사라지지 않을까? 집집마다 음식이 배달될 만큼 풍요로운 세상에서 왜 카라치의 가난한 아이들은 여전히 굶주리는지, 궁금해졌다.

수녀님 말마따나 가난한 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빈곤이 해결되지 않는지? 왜 가난한 아이들은 더 힘든 삶을 살아가는지? 나라 사이에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는지? 답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기 시작했다.

관련서적 여러 권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가난한 나라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나라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내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식민지배의 역사, 그리고 노예무역의 상흔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또한 가난은 이 나라 사람들이 게으른 탓이 아니라 선진국의 지배로 말미암아 권리를 빼앗겼기 때문인 것도 알았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독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 이해했다. 그 아이들을 돕고 있는 수녀님께 문자를 보냈다.

‘수녀님, 그곳의 친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또한 지난 삶을 성찰하며 정리도 했다. 그리고 남편한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남편도 현명한 판단이라고 좋아했다.

따지고 보면 파키스탄으로 헌 옷을 보내는 것은 엉뚱한 일이기도 했다. 헌 옷들보다 더 비싼 값을 운송비로 치러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선 어린아이들을 빼곤 모두 전통의상인 샬와즈카미즈를 입고 생활한다. 또한 그곳에서 헌 옷을 수입해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일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나는 내 양심을 달래거나, 생색내기 위해서 헌 옷 모으기를 했던 것이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 우리 부부는 카라치에 살았다. 남편이 그곳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던 곳은 부유한 마을이어서 물질적으로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조금만 벗어나면 굶주림을 면하려고 구걸하는 어른과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옷은 낡고, 맨발은 먼지와 상처투성이였다.

“저 애들 좀 봐. 너무 불쌍해⋯.”

나는 그 아이들의 물질적 가난한 보고 떠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이 나라에 일하러 온 엔지니어 부인으로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해보았다.

가끔 우리 부부는 마을의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곤 했다. 그때 가게 창밖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속이 답답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거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는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 했다. 또 그 아이들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더구나 하느님이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이 나라 부자들은 너무해!”

단지 이런 생각만으로 아이들의 가여운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이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아직도 카스트제도 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현실은 너무 가혹해 보였다. 그러나 이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체념했다.

복잡한 문제 앞에서 나는 회피하기 바빴다. 그리고 이방인인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며 자위하기 바빴다.

그러다가 독이 될 수도 있는 자선을 베풀기 시작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돈이나 물건을 주는 손쉬운 자선이었다. 내가 주는 몇 루피를 받고 기뻐하는 아이들, 밀가루와 설탕을 주면 나를 축복해주는 여자들을 보며 양심에 위안을 삼았다. 아니, 우월감을 느끼면서 묘한 즐거움까지 누렸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차에 밀가루, 설탕, 생수 등을 구비해놓았다가 눈에 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바빴다. 우리는 감정과 기분에 휘둘린 나눔을 했던 거였다.

선교사님들은 우리 부부의 행동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돈을 주면 가난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구걸을 할 것이고, 또 그 구걸한 돈을 빼앗아 가는 나쁜 어른의 수입만 올려준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몰랐다. 선진국의 수입품이 잔뜩 쌓인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일부터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야 도움이 된다는 것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무엇보다 현지인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는 일, 봉사하는 일, 신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는 일조차 망설이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방인 생활에 지쳐서 돌아가고 싶을 즈음이었다. 현지인 신자인 군인의 초대를 받았다. 성당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그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주님처럼 친절하게 다가왔다.

해군인 낫시르 씨였다. 그 가족은 공무원 신분이지만, 신앙을 지키고 있었고, 아들은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그날 낫시르 씨 집을 방문하고 많은 편견이 깨졌다. 이 나라에서 기독교인은 심한 차별 대우를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당할 것이라는 편견부터 깨졌다. 그는 군인이지만 승진도 잘했고, 이슬람 신자인 다른 해군들과도 잘 지내고 있었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13평 정도로 카라치에서는 중산층이었다. 우리 부부의 눈에는 비좁고 낡은 아파트였지만, 다섯 식구가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 음식 내음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각종 향신료의 냄새가 그 좁은 집에 가득 찼다. 생선커레이 냄새가 압도적으로 풍겼다. 나는 평소 향신료가 든 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왠지 입맛이 돋았다.

그 가족은 환한 미소로 우리 부부를 환대했다.

“킴, 널 위해서 새벽에 수산시장 갔다 왔어. 싱싱한 생선을 사서 요리를 했지.”

낫시르 씨가 말했다.

그는 앞치마를 두른 채 국자를 들고 있었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인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 모두 좁은 안방에 둘러앉아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가정식 밥상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었다. 이곳의 남자들은 권위적일 것이라는 내 편견을 산산이 깨뜨렸다. 또 부인과 자녀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지 밥을 먹는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코스요리처럼 음식을 계속 내왔다. 우리는 그 음식을 먹으면서 낫시르 씨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가장들의 자애롭고 인자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안방에 걸린 큰 나무 십자가와 조상들의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십자가를 걸어놓아도 이슬람 신자인 친구들이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영국 식민지 시절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의 조상들의 사연도 전해 들었다.

선교사 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의 신앙심에도 감동했다. 아들은 ‘땅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전하여라’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있었다. 기독교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낫시르 씨 딸의 박애정신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만나는 모든 환자들이 예수님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날 우리는 음식만 먹은 것이 아니었다. 한마음으로 밥을 먹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축복했다. 예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가득함을 서로 간증했다.

정말 우리는 친구였다. 나는 낫시르 씨 부인인 무스페라와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가족 같은 친구를 만나도록 허락하신 주님의 사랑에 가슴이 벅찼다.

그 후로도 낫시르 씨 가족과 자주 어울렸다. 나도 그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우리는 현지인 시장은 물론 파키스탄 모헨조다로 유적지에 같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친구란 정말 특별한 관계다. 그때 우리의 삶은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는 더 이상 친밀히 만날 수 없었고, 급기야 나는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남편은 일 때문에 남기로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고립감을 느꼈다. 남편과 친구를 잃은 기분이었다. 이런 상실감에 빠져 일방적인 방식으로 그곳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했던 것이다. 헌 옷 모으기는 이렇게 시작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수녀님한테서 답장이 왔다. 선교회를 통한 후원과 기도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나는 쉽게 공감했다.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계시는 소피아 수녀님과의 관계도 중요한 것을 알았다.

소피아 수녀님은 내가 떠나온 후에 파키스탄으로 파송되었다. 그래서 내가 살 때는 한 번도 얼굴을 뵙지 못했다. 그 후 남편을 통해서 수녀님과 연락이 닿았다. 우리는 카톡 방에서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런데도 나는 교회에서 행하는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문득 새로운 질문들이 떠올랐다.

왜 나는 수녀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만 보내면 된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내 방식으로 그곳 사람들을 도우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소피아 수녀님을 통해서 돕는 일이나, 가톨릭 선교회가 하는 일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평소 주일 미사에서 주보를 받아도 교회의 선교 사업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다. 선교는 ‘하느님의 일’이며 하느님이 하신다는 것도 간과했다. 결국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과 기도와 사랑을 하나로 모아 한마음으로 주님의 빛을 밝혀야 한다는 핵심도 놓쳤던 것이다.

이제는 누구보다 그곳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의 삶을 기뻐하고, 기도하고, 후원해야 함을 알았다. 그러자 주보에서 하느님의 일이 눈에 띄었다. ‘해외선교를 위한 영적 꽃다발’ ‘해외 선교 후원’ 등 동참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건 겸손이었다. 겸손이란 모든 상황에서 세심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선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주님의 일에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후 소피아 수녀님과 낫시르 씨 가족과도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수녀님과 자주 현지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것이 수녀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기쁨이기도 했다.

수녀님은 성 안토니 본당에서 봉사를 하고 계신다. 그 성당은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수녀님은 그 학교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다시 학교에 보내려고 준비시키는 성 요한 스터디센터에서도 봉사하신다.수녀님이 하시는 일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고자 그곳 학교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을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소피아 수녀님과 친구가 되었다는 기쁨이 충만했다. 또한 낫시르 씨 가족과도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 가족이 우리를 초대해 준 것처럼 그들을 한국의 우리 집에 초대해서 즐거운 우정을 쌓을 예정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예수님의 은총을 실감하며 날마다 우정을 쌓아나가길 소망하게 되었다.

그 우정은 하느님께 영광, 우리 안의 기쁨이었다. 우정을 제대로 꽃피우려면 성모님이 아기를 맞이하듯 정성 어린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알았다.

이제 나는 카라치의 사람들이 가난을 극복해내는 힘을 지켜보고 있다. 나 또한 일상에서 그 가능성의 생활화에 힘쓰고 있다.

동네 슈퍼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물건을 사려고 노력한다. 또 공정무역 단체가 만든 제품을 소비하려고 노력한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일에 동참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에서 하는 일, 그리고 현지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작은 관심이 쌓여 큰 결과를 이뤄낸다. 당장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이런 관심이 양심 달래기 구호품이나 생색내기 원조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매주 미사에서 받아보는 주보에서 ‘하느님의 일’ 소식에 관심을 기울여 읽었다. 현지 선교사님들의 소식을 대하며 감사와 기쁨을 느꼈다. 선교사님들이 그곳에서 잘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로 연대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연대의 힘으로 땅 끝까지 주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도 알았다. 그러자 주님의 자애와 사랑이 온 땅을 덮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불현듯 이 말씀이 떠올랐다.

‘주님의 집은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