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 예물 폐지하는 필리핀 교회
플라비 빌라누에바 신부가 지난해 12월 ‘마약과의 전쟁’ 희생자들을 위해 처음 조성된 추모 공간에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골함을 묻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계없음. OSV
필리핀 교회가 미사는 물론 세례·혼인·장례 등 각종 성사 거행 때 감사예물을 받는 관행을 폐지해 나가는 움직임은 대담하면서도 필요한 조치라고 필리핀 신학자 루벤 멘도사가 밝혔다.
멘도사는 ‘필리핀에서 성사는 판매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아시아 가톨릭 통신(UCAN)에 기고한 칼럼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예물 부담 때문에 세례식을 미루거나 일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며 이같이 말했다. 멘도사는 아테네오 데 마닐라대학 신학과 부교수다. 국제신학네트워크(INSeCT) 회장을 겸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예물 부담 커
예물 봉헌은 초대 교회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자 교회법적 제도(교회법 제945조~958조 참조)다. 예물은 성직자의 성무 활동비와 교회 선교 사업비·자선기금 등으로 쓰인다.
문제는 필리핀에서 예물 봉헌이 ‘관행적 의무’처럼 굳어져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성직자는 예물이 많이 들어오는 본당을 선호하고, 회계 부정이 일어나는 등 부작용이 끊이지 않는다. 식당 메뉴판처럼 예물 가격이 표시된 곳도 있다.
필리핀에서는 예물 봉헌을 ‘아랑셀 제도(arancel system)’라 부른다. 스페인어 ‘arancel’의 사전적 의미는 관세 또는 서비스 공식 요금이다.
아랑셀은 16세기 스페인 식민통치 초기에 생긴 제도다. 스페인 선교사들은 부족한 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종의 세금처럼 이를 부과했다. 당시는 스페인 선교회 본부에서 돈이 도착하는 데 수년이 걸린 터라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시급한 건축비와 선교 사업비를 충당했다. 그러는 사이 모든 성사에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예물)을 치러야 한다는 의식이 굳어졌다.
필리핀 주교회의는 이런 잘못된 의식을 타파하기 위해 2021년 아랑셀 제도를 점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내용의 사목 서한을 발표했다.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걸 첫 번째 이유로 들었다. 링가옌-다구판대교구는 주교회의 발표 몇 해 전 선제적으로 제도를 폐지했다. 하지만 재정 자립이 어려운 본당이 많은 데다 워낙 고착화된 제도이다 보니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본당 재정난 극복 대안은
멘도사는 “빈곤층이 자녀의 세례를 미루는 이유는 세례의 은총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물 등 본당에 내야 하는 비용이 많기 때문”이라며 “성사는 ‘지급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사는 판매용이고, 사제 수입원이라는 의도치 않은 인상을 준” 이 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재촉했다.
하지만 대안 없이 폐지만 촉구하기도 어렵다. 당장 가난한 본당들은 더 심각한 재정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가 폐지 움직임을 ‘담대한 조치’라고 말한 이유다.
그는 주교회의와 마찬가지로 제도 폐지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할 대안으로 ‘청지기 영성’을 강조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희생과 봉헌 △교회 활동의 자발적 참여 △투명한 재정 집행과 감사가 이 영성의 핵심이다.
그는 제도 폐지로 기대되는 유익한 영향도 언급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당부대로 사목자들이 ‘양 냄새를 맡으러’ 더 열심히 변방으로 나가고, 가난한 이들의 삶 터에 ‘야전병원’을 세우기 위해 창조적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쳤다.
김원철 선임기자 wckim@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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