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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사람들

특별기고 - (8) 성전 건립 유감(有感)

참 빛 사랑 2024. 11. 3. 17:46
 

<성전 건축>

 성전 건립의 필요성도 절박했고 중요성 또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중차대한 일을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열악한 형편에서 과연 가능하겠는가... 두려움과 의구심.. 아울러 꼭 내가 해야만 하는가? 여러 가지 생각과 걱정으로 수많은 날을 고민하고 다시 생각해보고 또다시 짚어보고... 무엇보다도 죽기보다 싫었던 그 물품판매... 그리고 어쩌면 동냥 혹은 구걸(내 표현으로는 앵벌이?)을 또 해야만 할 것인지 생각과 고민이 깊었다. 그냥 조용히 사목에만 열중하며 5년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 갖은 생각과 고민과 망설임 끝에... 누군가는 해야 할 일... 그 일이 내게 주어졌다는 확신과 사명감,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무엇보다도 하고 싶다는 열망 끝에 어려운(위대한?) 결단을 내렸다.

 사목회와 교우들도 과연 그게 가능하겠는지 의아해 하며 무엇보다도 본당의 열악한 재정을 이유로 두려워하였다. 그렇게 모두들 선뜻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본당신부가 나름대로 결단한 굳건한 확신과 방법을 듣고 서서히 확신과 희망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재원 문제가 가장 큰 난제였지만, 나는 그보다도 어떤 모습의 성당, 어떻게 성전을 건축할 것인지가 더욱 중요했다. 나에게 성당은 나와 어머니와 우리 가족이 첫 발걸음을 내디뎠던 공주 (중동)성당이 진짜 성당이었다. 나와 어머니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꾸고 구원한 그 성당의 모습이 내 뇌리와 가슴 속에 인호처럼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고, 다른 성당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게 성당이지~”라는 강렬한 확신과 반드시 그런 성전을 이루겠다는 굳건한 목표가 세워졌다. 그것은 진잠 성당에서 이루려던 못다 핀 꽃이었다.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외부나 내부나 성당 같은 성당, 성당에 들어서면 제단을 바라볼 때 두 손이 모아지고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거룩하고도 아름다운 성당, 무엇보다도 100년 이상 오래도록 유지될 견고한 성당, 그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탐색과 검색을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성당의 건축 양식은 고딕 성당이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성당 중에서는 명동 성당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성당이 없었다. 나의 컨셉은 편의성보다는 ‘거룩함’이 묻어나는 성당이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고딕 성당 비슷한 성당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아무리 다녀봐도 고풍스럽기는 하지만 고요하고 거룩한 맛이 별로 없었다. 명동 성당도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기는 하지만 시야가 가려지고 어두웠다. 또 유구 성당은 그렇게 클 필요도 없었기에 아담하면서도 예쁘고 튼튼하고 아름다운 성당... 세계의 아름다운 성당들을 검색해보니 인류문화유산이라 할 만한 이탈리아, 스페인을 비롯한 기가 막힌 성당들이 부지기수였다. 웅장하고 장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성당을 유구에 구현하기는 불가능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성당들도... 뭔가 많이 부족했다.

 

  나름대로 큰 돈을 들여 온갖 정성을 기울여 지었겠지만.. 제단에서 풍겨 나오는 전례적인 맛도, 운치도, 색감도 맘에 들지 않았다. 기금 마련을 위해 수 백 개의 성당을 찾아다녔지만... 솔직히 ‘성당이라고’,‘하느님의 집’이라고 느껴지는 성당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일본의 성당을 보게 되었는데... ‘아~ 그래 이거다’. 겉모습은 여느 시골에나 있는 평범한 교회당 같지만, 내부는 정교한 디자인과 정성이 깃든 아름다운 성당들이 많았다. 소박하면서도 정성이 녹아든 그 모습에 마음이 움직여서 결국은 직접 가보기로 하였다. 나름대로 설계에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의뢰하여 결과물이 나왔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건축이니, 설계에 관해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 눈썰미로 볼 때는 아니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설계를 맡은 사람과 일본행을 결행했다. 성지순례를 겸한 공부의 마음으로 떠났다. 마침 그때만 해도 코로나 펜데믹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지만 다행히 아직 출국까지 제한하지는 않는 때여서 아슬아슬하게 다녀왔다. 일본의 옛 성당들은(새로 지어진 성당들도 그런 편..) 하나같이 정겹고 소박하며 아름다웠다. 게다가 토속적인 정서와 문화가 다분히 스며들어 있었다. 순례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한 확신과 열망에 가슴이 부풀고 설?다.

 

  기본 모델은 공주 중동 성당을 모델로 하되, 똑같게는 안 하고 보다 아름답고 균형 잡힌 모습으로 설계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나는 설계도 건축도 문외한이었다.나름대로 설계에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의뢰하여 결과물이 나왔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시도하고 또 맘에 안들고 또다시 하고 또 실패,,,시행착오를 여러 번 거쳐서 최선을 다해 설계했지만 적어도 내 눈썰미로 볼 때는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을 하고 나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미 지어진 비슷한 모양의 성당들을 방문해서 꼼꼼히 살펴보니 역시나 맞지 않는 구석이 많았고, 우리 성당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수정하고 수정해서 가까스로 설계를 마쳤다. 그 다음에는 시공사를 선정하려 몇 개 업체를 알아보았으나 책임자의 안목이나 성향, 공사 경험이나 그 설계사와 시공사가 건축한 성당들을 둘러봐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결국 고딕 성당을 여러 개 건축한 경험이 있는 이웃 교구의 건축업체를 선정하여 건축 회의를 진행하며 어렵게 첫 발을 내디뎠다.

 
옛 성당 철거 전 마지막 미사. 정필국 신부 사진제공
 

  유구 성당은 무엇보다도 32위 순교자들이 출생하시고 사셨던 거룩한 산골이기에 나는 우리 성당을 성지로 개발할 장기적 목표를 염두에 두고 정말 잘 짓고 싶었다. 매주 진행하는 건축회의, 본당 신자 중에 그냥 일반 주택이나 사무실 정도 지어본 사람은 있어도 제대로 설계사나 건축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어 외부에서 설계와 시공을 맡고 우리 측에 전문가가 없어서 다소 뒤늦었지만 건축을 철저히 감독하도록 우리 측 공사 감독도 두었다. 건축회의에, 기금마련을 위한 성당 출장, 설계도를 가지고 다른 성당에 찾아가서 물어보고 확인하고... 이불을 만들고 개고 포장하고 이를 위해 마당에 컨테이너를 설치해서 햇볕이 안 들게 보관하고, 물품판매를 위해 트럭과 봉고 버스를 구입하고, 그렇게 결국 뒤늦게 기공식을 하고 터파기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기존 성당이 헐리기 전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전 신자가 성모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묘한 기분과 서운함이 밀려들었다.그리고 50년을 달려온 성당, 수많은 교우들의 희로애락과 땀과 눈물, 기도와 정성이 스며있는 성당이 새로 지을 성당과 연속되도록 기존 건물 제대 부분 돌조각과 벽돌을 떼어내어 새 성당 제대 밑에 묻어놓고 성당 현관에 표지석을 새겨 넣었다. 공정회의와 미사, 성사, 기금마련을 위한 물품 생산, 포장, 보관, 성당 출장과 기금마련 미사... 그때부터 어찌 살았는지 정신없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정신없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걱정 중에도 그런대로 또 잘 굴러갔다. 참 묘한 일이다. 하느님의 집을 마련하는 일이 내 뜻대로, 내 힘으로만 되지 않고, 또 뜻한 것 이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신기하고 감사했다.

 

  유구가 갖는 역사적 의미, 교회사적으로 의미를 생각할 때 200년 전 섬광처럼 어두운 조선 땅을 진리의 빛으로 불 밝히신 우리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은혜로운 마을이기에, 나는 성지를 개발하는 마음으로 성전 건립에 임했다. 그래서 이 성당을 우리 순교자들께 봉헌한다는 마음으로 임했기에 벽돌 하나, 나무 한 토막도 그 모양이나 색감을 일일이 내 눈썰미로 체크하고 확인해서 마음에 드는 것을 선정하고 시공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람의 신앙과 상관없이 이 성당이 수많은 우리네 부모 형제들에게 큰 위로와 힘과 안식처가 되는 거룩한 집이니 성심껏 지어달라며 부탁하고 밥도 자주 사주고 격려했고, 잘못할 때에는 가차 없이 불호령을 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옛 성전이 헐리고, 터파기가 시작되며 교육관을 먼저 지었다. 그래야 미사를 봉헌하고 회의를 하고 사무 업무를 볼 수 있으니~ 사제관도 지어야 하니 허물고 마을에 연립주택으로, 아파트로 이사해서 출퇴근을 했다. 새삼 교우들이 미사 하러 오는 일이 녹록치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계속>

 

- 대전교구 정필국 베드로 신부



 
성모 성월 공동 묵주기도. 정필국 신부 사진제공

<본당 설립 50주년 기도문>

(1968.12.28)

 

○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주님

 

   하느님의 종 윤자호 바오로와 강덕중 바오로 및

 

   동료 순교자들과 선조들을 부르시어

 

   이곳에 비밀 신앙 공동체를 세우시고

 

   그분들의 뜨거운 신앙과 증거로 이 땅을 거룩하게 하시고 신앙의 자유기에

 

   교회 재건의 모퉁잇돌이 되게 하셨으니

 

   감사와 찬미를 드리나이다.

 


● 아울러 지난 반세기 동안 저희 공동체를

 

   이끌어 주시고 보살펴 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주님 뜻에 맞갖은

 

   참다운 믿음의 공동체로 거듭나려 하오니,

 

   저희가 빵보다는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며,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성체의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 특별히 순교자들과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이

 

   살아 숨 쉬는 이곳에 오랜 숙원인 성전

 

  (성당,사제관,교육관)을 건립하려는

 

  저희의 간절한 열망을 축복하시고

 

  이런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 /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 "너희가 내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참으로

 

    나의 제가가 된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사도 2.42-47)

 


◎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님!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유구본당의 주보이신 노동자 성 요셉!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유구 지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