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화 이글스 팬입니다. 대전 출신이라 당연하다 하시겠지만, 나름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제 어릴 적 대전의 야구팀은 박철순·윤동균·신경식의 OB 베어스였습니다. 원년 우승을 거머쥔 멋진 팀이었죠. 저는 그런 베어스와 파국이 예정된 사랑에 빠졌고요.
3년 후 베어스는 서울로 가버리고 상처 입은 저는 그 후로 프로야구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대전의 빈자리를 채운 이글스가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뽐낼 때도, 류현진이 스타덤에 오를 때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우연히 한화 이글스의 리빌딩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꼴찌팀의 뜨거운 도전 이야기를 울컥울컥 하며 몰아보고는 새롭게 팬이 되었습니다. 꼴찌가 우승보다 감동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실패할 자유’. 미국에서 영입된 리빌딩 전문가 수베로 감독이 한화의 젊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한 이야기입니다. 웬만한 방법으로는 나아질 길이 보이지 않는 팀이,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들을 대거 내보내고, 젊은 선수들로 교체해 체질 개선을 꾀하는 것을 리빌딩이라고 하죠. 극약처방입니다. 한화는 리빌딩을 선언하고 당장의 순위 경쟁보다 미래를 위한 준비로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팀과 선수들에게 강조된 것이 바로 실패할 자유입니다. 즉 도전할 자유입니다. 결과가 아니라 도전 정신을 보고 손뼉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실패할 자유는, 일차적으로는 성공을 목적으로 한 자유겠지요. 과감하게 도루 시도하다가 아웃도 당해보고, 자기 공의 위력을 믿고 직구를 찔러넣다가 홈런도 맞고 하면서 결국은 도루왕·투수왕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공이 목적인 이런 ‘실패할 자유’는 한시적입니다. 실패가 거듭되면 결국은 멈춰야 할 테고, 성공이 이어지면 실패를 추구할 이유가 없어지니까. 실패할 자유를 이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뭐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할 자유를 사는 삶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성공과 실패 이전에 있는 것, 도전 그 자체입니다. 그 깊이에선 이제 성공과 실패의 차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전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수억 원대 연봉의 선수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선수가 감동을 주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선수라도 꿈을 잃지 않고 정진하는 선수가 결국은 팬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도전이 중요한 것이니까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허무주의에 대한 반발로 폭발적으로 생겨난 실존주의 철학은, 내 존재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실패할 자유를 마음껏 사는 이들의 도전이 바로 ‘실존’이고 이 실존이 의미를 창조합니다. 물리적으로 숨이 붙어있는 상태인 ‘생존’은 삶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합니다. 도전하지 않는 이들을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삶의 ‘이방인’이라 불렀습니다. 왕년에, 젊었을 때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 시절의 성공에 기대어, 혹은 그 시절의 실패를 탓하며 지금 도전하지 않고 있다면, ‘실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결국 우리 삶에 대한 이방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리빌딩 시즌을 거친 한화 이글스는 승률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하위권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제 기분도 천국과 지옥을 오르락내리락하고요. 그럼에도 이글스는 올해 홈 17경기 연속 매진, 시즌 최다 경기 매진 등 신기록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실패할 자유가 폭발하고 있고 도전 정신이 가득 차 있는, 참으로 행복한 팀이고 그런 그들을 저는 사랑합니다. 행복하게 야구하다 보면 성공은 언젠가 (제발!) 그들을 따라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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