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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상교리] (3) 한국 천주교회

참 빛 사랑 2022. 5. 3. 20:51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신도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교회

▲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이벽 등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들이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는 모습을 그린 한국 천주교회 최초 공적 집회도. 탁희성 화백 작. 출처=가톨릭굿뉴스
 
 
한국 천주교회는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조선에 한문 천주교 서적이 전래된 이후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를 연구하던 모임이 시작됐는데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을 때부터 본격적인 신자 공동체가 시작됐습니다. 이승훈은 귀국하여 이벽을 비롯해 함께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줬고, 지금의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부근의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열었습니다.

한편,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 조선 시대는 유교 사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유교 사상에 회의적이라는 건 자칫 자신과 가족이 사회적으로 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실학파 학자들은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적으로 접하게 된 새로운 종교, 천주교의 가르침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자유와 평등 사상 가르침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행적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 사랑과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은 당시로써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이며 자매라는 가르침은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라는 엄격한 신분 차별이 있던 사회에서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지배층은 천주교를 기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위험 세력으로 판단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을 부모도 나라님도 모르는 대역무도의 무리, 사학죄인으로 몰아 모진 박해를 가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 동안 네 번에 걸친 커다란 박해(신유ㆍ기해ㆍ병오ㆍ병인)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교사 영입과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힘쓰던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가 중국 상하이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Ferrol, 1808~1853)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음으로써 최초의 조선인 사제를 맞게 됐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는 귀국하여 일 년도 채 안 된 이듬해 체포되어 순교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모진 박해에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배교하겠다”는 한마디면 단란했던 가정, 잃었던 명예와 가산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던 많은 순교자 가운데 103명은 1984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시성돼 전 세계 천주교 신자들의 공경을 받게 됐고, 124명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시복돼 한국 신자들의 공경을 받게 됐으며, 또 다른 순교자와 증거자의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


오늘날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이런 모습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복음 선교 활동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사회 복지 활동, 사회 정의와 경제 정의의 실현, 인권 증진, 그리고 생명과 환경 보호를 꾸준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봉사하고 남북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북한의 형제자매들에게 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하게 평신도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신앙을 고백하고 보존하는 일에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신앙 유산은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에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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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성인] 성 필립보, 성 야고보 (5월 3일)




필립보는 시몬 베드로 및 안드레아와 고향이 같습니다.

벳사이다 출신(요한 1,44)으로 필립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말(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부르신 다음 날 필립보를 만나시고는 “나를 따르라” 하고 부르셨습니다.(요한 1,43)

필립보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한 것으로 유명합니다.(요한 14,8-11)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면서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고 말했지만, 예수님에게서 호된 질책을 당하지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예수님 부르심에 제자가 됐으면서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지 못해 깨우침을 받곤 했던 필립보는 성령강림 후 사도단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필립보는 흑해 서부 스키티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년에는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에 있는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지내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하지요. 이때 필립보 나이는 87살이었다고 합니다.



작은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매이거나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작은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루살렘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분명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를 두고 교회의 ‘기둥’이라 부르며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열두 사도의 하나로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는 그가 알패오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동일시하면서 야고보 사도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에우세비오의 「교회사」에서 헤제시푸스는 야고보가 성전 꼭대기에서 내던져졌는데 그래도 죽지 않자 몽둥이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은 야고보 사도는 때때로 몽둥이를 든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지요. 야고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으며, 그가 신약성서의 야고보서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열두 사도 대성전을 봉헌할 때 제대 밑에 필립보와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함께 모셨다는 전승에 따라 두 사도의 축일을 함께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