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제가 생기면서 L씨가 구설수에 올랐다.
“이렇게 식별력이 없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면 안 되죠.” “센스가 하나도 없다니까요.” “게다가 느리기까지 하다고요.”
계속 듣고만 있던 S씨가 입을 열었다.
“빠른 사람 옆에 있으니 느리게 보이는 거지요.” 예기치 않은 S씨의 반격에 사람들은 다소 당황한 표정이다. 그러면서 S씨는 최근에 민첩하면서도 똑똑한 K씨와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이 바닥에서는 ‘프로’입니다. 하지만 K씨 옆에만 있으면 ‘멍’해지고 바보가 되는 느낌이에요.” 사실 S씨는 오랫동안 복지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라고 할 만큼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다. “나보다 더 잽싸고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 옆에 있으니 내가 느리고 무능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 거죠. 그럴 때 어떡해요?” 약간 흥분하였는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냥 기다리는 거지요. 내가 그 사람처럼 빨라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나는 ‘기다렸다’는 그의 말에서 K씨의 자리를 존중해주면서도 자기 자리에 머무는, 그러니까 비교되는 그 순간에도 비교하지 않는 S씨의 성숙함이 느껴졌다.
S씨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진심이 통했기 때문이다. 왜 많은 이들이 S씨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누군가와 비교당할 때, 나보다 더 똑똑하고 빠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본능적으로 저항하고 그를 밀어내고 싶어진다.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높은 경지의 미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우리는 누구나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겸손한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든 나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밀어내거나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 그래서 내가 겸손하기는 어려워도 겸손한 사람은 금방 알아보고 좋아한다.
S씨가 헤어지면서 한 말이 아직도 진한 울림으로 남는다.
“그러니 L씨보다 빠른 우리가 인내하고 지지만 해준다면 그의 안에 있는 좋은 기운으로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을 거라 믿어요.”
겸손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영을 볼 줄 안다. 빠른 너나 느린 나나 똑똑한 너나 부족한 나나 모두의 내면에는 ‘좋은 기운’이 있다. 그리고 그 기운으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방식이 다르고 속도가 달라도 결국 ‘좋게’ 해결될 것이란 희망은 겸손한 자만이 품을 수 있다.
살레시오 성인은 겸손을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첫째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해야 행복한지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S씨는 K씨만큼 빠를 수 없고 또 그런척하면 오히려 자신이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둘째는 말로만이 아닌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S씨는 똑똑한 사람 옆에서 자신이 바보 같았던 그 느낌을 피하지 않았고 진심으로 인정했다.
셋째는 인정한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S씨는 많은 사람 앞에서 K씨보다 절대 잘나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고백했다.
넷째는 낮은 처지를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슬픔과 분노는 저항의 결과다. S씨는 자신의 처지를 사랑했기에 수용하고 기다릴 수 있었다.
마지막 단계는 자신의 낮은 처지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갈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레시오는 이 단계까지 가는 사람은 매우 적지만 여기에서만큼 행복을 주는 것은 없다고 한다.
S씨가 이 단계까지 이르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힘겨워하는 L씨를 끝까지 믿고 희망하는 그의 진심 어린 태도에서 이미 겸손의 완성을 보았다.
성찰하기
1 나의 어떤 생각과 선택이 나를 진짜 행복하게 해주는지를 자주 생각해요.
2 나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진심으로 인정하고 또 말해요. 진심은 통하니까요.
3 나의 한계를 사랑하고 품어주면서 기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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