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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국외)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참 빛 사랑 2015. 5. 21. 09:06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 비잔틴 시대 바실리카 성당 터. 장방형의 이 성당은 바닥에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성당 뒤편 붉은 암반에서 유래돼 이곳을 '마알레 아둠밈'이라 불렀다. 리길재 기자



▨ 성경의 이웃과 교부들의 해석

 '이웃'이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성경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동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속된 공동체로서 그 안에서는 누구나 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있으며 각 개인은 자신에게 삶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공동체 전체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함께 사는 이주민도 동족 사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도 이단자와 밀고자, 반역자들은 이웃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유다인 혼혈로 다신을 믿었던 사마리아인은 기원 후 6년과 9년 사이에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하필이면 파스카 축제 기간에 사람의 뼈를 뿌려 성전을 더럽힌 죄로 이스라엘의 '이웃'이 될 수 없었다.

 교부들은 예수님의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그리스도와 연관지어 해석한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가에 초주검이 돼 쓰러져 있는 사람은 '인간'을 상징한다. 사제와 레위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본디 역사 자체만으로는, '문화와 종교'만으로는 치유가 이뤄지지 않는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다름 아닌 인간을 상징한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낯설고 멀리 계신 분이다. 그 하느님이 몸소 나서시어 당신의 얻어맞은 피조물을 보살피신다. 먼데 계신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 되어주셨다. 당신이 몸소 기름과 포도주를 우리 상처에 부어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일곱 성사의 치유 선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분은 우리를 여관까지 데려다 주셨다. 이 여관은 '교회'를 상징한다. 하느님은 교회에 우리를 보살펴 주라고 맡기시고는 우리를 돌보는 데 드는 비용까지 대신 치러주셨다.

▲ 비잔틴 시대 마르티리우스 수도원 터에서 발굴한 모자이크(사진 위)와 제대석.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유적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려면 광활한 유다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해발 1000m 높이에 36㎞나 펼쳐진 유다 광야에는 대상들과 여행자를 위한 여관인 '칸'이 있었다.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루카 10,29-37)이 있던 곳의 성경 지명은 '마알레 아둠밈'(Maale Adummim)으로 우리말 새 성경에서는 아둠밈 오르막'(여호 15,7)으로 옮겨놓았다. 히브리말로 마알레는 '오르막, 언덕'을, 아둠밈은 형용사 '붉은'의 아돔(adom), '피'를 뜻하는 명사 담(dam, 복수는 damim)에서 유래한다. 우리말로 '붉은 오르막' 또는 '피의 언덕'으로 불린 이유는 이 지역 바위가 붉은색을 띠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노상강도의 빈번한 습격으로 여행자들이 피를 많이 흘린 곳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터는 예루살렘 8개 성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다마스쿠스 문에서 출발해 올리브산, 벳파게와 베타니아를 지나 예리코 가는 길 중간쯤인 18㎞ 지점에 있다. 기원전 10세기 때에는 이 길을 예루살렘에서 아리바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라 해서 '아리바 길'이라고도 했다. 이 길은 예리코에서 갈라져 갈릴래아로, 또 요르단의 예수님 세례터 베타니아까지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분리장벽에 가로막혀 벳파게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베타니아로 바로 갈 수 없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1번 국도에서도 붉은 암반 사이로 자리 잡은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유적을 볼 수 있다.

  일교차와 기후 변화가 심한 광야 지대인 이곳의 주민들은 제2차 성전 시대(기원전 538~서기 70년)에 연한 석회암을 파서 만든 동굴집에서 살았다.

 기원전 1세기 이곳은 헤로데 대왕의 예리코 겨울궁전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헤로데의 행차를 돕기 위한 작은 궁이 있었다. 궁은 목욕탕과 모자이크 마루, 프레스코화로 치장된 방들을 갖추고 있었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 이 궁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와 대상들의 여관이 됐다. 또 로마 제국시대 '아둠밈 오르막'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한 후 새로이 지은 '엘리아 카피톨리나'의 수비대 요새가 있었다.

▲ 비잔틴 시대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물저장고.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이 여관은 비잔틴 시대 순례자와 대상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아둠밈 오르막이 착한 사마리아인을 기념하는 장소라고 처음 말한 이는 4세기 예로니모 성인이다. 4세기 비잔틴 시대부터 13세기 십자군 시대까지 유다 광야 아둠밈 오르막에는 여러 수도원이 세워졌다. 6세기께 이곳에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기념 성당과 순례자를 위한 여관이 지어졌다. 여관은 26x24m 크기로 남쪽으로 문이 있고 중앙 정원과 물저장고가 있었다. 21x11m 규모의 장방형 바실리카 성당은 두 줄로 된 기둥들이 신자석을 구분했고, 바닥은 기하학적인 문양의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었다.

 십자군 시대에는 아둠밈 오르막에 수천 명의 순례자를 위한 대규모 성당이 지어졌다. 성전기사단이 1169~1172년까지 3년에 걸쳐 지은 이 성당은 규모가 60×70m에 달했다. 성전기사단은 비잔틴 시대 물저장고를 너비 16×7m, 깊이 7m로 더욱 확장해 돔으로 덮었고, 성당 북동쪽 끝에 요새를 만들었다. 그들은 요새 둘레에 암반을 잘라 폭6~7m, 깊이 4m 해자를 만들고 높이 9m의 망루를 세워 사방을 감시했다.

 테오도로스가 쓴 1172년 기행문에는 "베타니아 넘어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4마일에 성당과 함께 붉은 물저장고가 산꼭대기에 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버려진 곳이라고 한다. 또 전승에 의하면 유다의 마지막 왕 치드키야 임금이 이곳에서 바빌로니아 군대에 사로잡혔다(2열왕 25,5)고 한다. 성전기사단은 이곳을 튼튼하게 요새화했다"고 적고 있다. 오늘날 폐허가 된 착한 사마리아인의 여관 유적은 1번 국도를 사이로 북쪽에는 요새, 남쪽에는 성당으로 분리돼 있다.

 성전기사단이 지은 요새와 성당, 순례자 숙소는 이슬람 제국에 함락되면서 19세기 중반까지 보잘것없는 형태로 남아 있었다. 순례자 여관은 카라반(대상)의 숙소 칸으로 이용됐고, 1903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 경찰서로 사용되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됐다.

 영국군 위임통치 시기(1934~1936)에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기념 성당을 발굴 부분적으로 복구했으나 관리 소홀로 순례자들이 기념물로 성당 모자이크 대부분을 떼어가 버려 크게 훼손됐다. 다행히 최근 수년에 걸친 복원 작업으로 착한 사마리아인 여관 기념 성당 모자이크는 제모습을 찾았다. 현재 이곳은 이스라엘 국립공원과 관광성에서 관리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