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셨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한다. OSV
베드로 사도의 설교, 곧 첫 복음 선포로 3000명가량이 회심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날 세례를 받고 처음으로 교회 구성원이 된 이들은 지금처럼 가톨릭교회 교리를 철저히 배운 다음 입교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진실로 믿고 개종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부활 자체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불러일으킴을 증명합니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예수님 부활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입니다. 제자들의 부활 신앙이 예수님을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부활 신앙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선포, 곧 ‘케리그마(κῆρυγμα)’는 장정 3000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을 만큼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강림, 곧 성령을 받은 후 첫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기까지 40일간 지상에 머무셨고, 열흘 뒤 곧 주님 부활 이후 50일째 되는 날(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 20장 19-23절에 따르면 성령은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주님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성령 강림에 대한 요한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시점 차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사건들을 요약한 반면, 사도행전 저자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주님 부활과 승천, 성령 파견과 강림에 관한 사건들을 구원사적으로 발전시키고 전개시키면서 정확한 사실들을 전해주고자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의 첫 복음 선포로 3000명이 세례를 받았고, 곧이어 장정만 5000명(사도 4,4), 또 수만 명이 믿음을 가져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급성장하는 것을 보여줍니다.(사도 21,20 참조)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모든 이도 ‘세례’를 통해서만 교회 안에 받아들여져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견진성사·성체성사와 함께 그리스도교 생활의 기초를 놓는 ‘입문’ 성사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세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세례는 물로써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사다. (⋯) 물에 ‘잠김’은 예비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묻힘을 상징하는데, 그는 그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2코린 5,17; 갈라 6,15)으로 나오게 된다. 이 성사는 또한 ‘성령에 의한 재생과 경신의 목욕’(티토 3,5)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사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을 의미하고, 이를 실제로 이루어 주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1214~1215항)
예수님의 공생활은 정확히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역사의 사건이며, 신화의 무시간성과 전혀 다른 실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세례’로 시작하십니다. 물속에 잠겨 물 밑으로 내려가면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며 새로 시작하겠다는 회심을 다짐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이러한 행동을 하셔야 할까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답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당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그 짐을 날라 요르단 강 속으로 가라앉히셨다. 그분의 첫 공생활은 바로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시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십자가를 미리 짊어지는 일이었다. (⋯) 예수님의 세례가 갖는 모든 의미, 곧 ‘모든 의로움’을 지고 가신다는 의미는 십자가에서 비로소 밝혀진다. 세례는 인류의 죄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 때 들려온 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는 부활을 미리 알려주는 소리다. 그리하여 예수 자신의 말씀에서 세례라는 말은 곧 그분의 죽음을 표현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나자렛 예수 1」 48~49쪽)
그리스도인의 세례, 곧 교회의 세례성사도 주님 세례의 참 뜻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해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새 생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본성, 옛날 표현으로 ‘천주성’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죠.
“세례받은 사람은 원죄와 모든 본죄를 용서받고, 성부의 양자,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이 되어 새롭게 태어난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와 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279항)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영성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함이 없는 삶은 쉽게 고착화돼 생명력 잃기 십상 (0) | 2025.01.04 |
---|---|
인간이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0) | 2025.01.04 |
성령의 은총 속에 성숙한 신앙인으로 이끄는 견진 (0) | 2025.01.04 |
동행하는 하느님 사랑과 희망 (0) | 2025.01.04 |
우리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희망의 순례자들 (0) | 2025.01.03 |